Self Stalking - 0
내 삶은 한 달 전과 비교했을 때 180도 달라져 있었다. 나는 그 사이에 1년의 장기 휴직 신청서를 제출하고 집 밖을 나서본적이 거의 없었다. 운이 좋았다. 모두가 그러니까 그렇게 믿는다. 한 달여 전에 나의 마지막 기억은 무언가 둔탁한 것에 뒤통수를 맞으면서 순간적으로 세상이 암흑으로 변한 것. 그 다음은 길바닥에 철푸덕 엎드려서 아려오는 머리와 잘못 손을 짚으며 꺾여서 퉁퉁 부어오른 손목. 누군가 내 가방과 코트 안주머니를 뒤적여 지갑을 빼내는 일과 내가 몸에 걸치고 있던 금붙이들은 모조리 챙겨 가는 느낌. 그 다음에는 희미했다가 머리에서 흐른 한 줄기의 피가 아스팔트에 엎어진 내 오른쪽 뺨을 적시는 일이었다. 왜 소설 같은 곳에서 피의 표현을 따뜻하다고 말하는지 그제야 알았다. 멀어지는 의식속에 눅눅하니 끈적한 피가 굳으면서 그런 느낌이 들었었다. 그 다음은 정신을 잃으며 잠들듯 기절했다가 병원.
수술은 잘 끝났다고 했었다. 경찰이 나를 발견해 긴급히 이송했고 시간에 맞출 수 있었다. 내 신분증을 비롯하여 운전면허증과 각종 신용카드들, 약 300달러 정도의 현금이 들어있는 지갑은 잃어버렸지만 나에게 그건 아무 상관 없는 문제였다. 거액의 수술 비용이 들어가는 일을 내 상의도 없이 왜 했냐고 따질 바보천치 얼간이도 아니다. 나는 내 생명을 구해주는데 최선을 다 한 의사들에게 최대한의 감사를 표시해야 했고, 의사가 연락하여 다시 나를 확인하러 와준 경찰관에게도 따로 사례를 했다. 그들은 한사코 거부했지만 강제로 내 돈을 가져가라고 매달렸다. 그게 전부다. 나는 다행스럽게 잘 회복했다. 의사들은 상처가 아주 크지는 않았고 보통 이런 일들과 비교했을 때 경미했다고 했다. 다만 아무래도 머리를 다치신 것이라 당분간 어떤 후유증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은 덧붙였다.
퇴원 전에 몇 가지 테스트들을 잘 해낸 이후였다. 기억력이라던가, 뭔가 사물을 분간하는 것이라던가. 하여튼 그런데도 의사들은 이후 무언가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작은 변화에도 두려워 하지 말고 반드시 병원을 찾으라는 말을 했다. 지나치게 인상을 찡그리며 두려워하는 나에게 이런 말은 머리를 다친 환자들에게 하는 관례라고 안심시켰지만 정작 나는 안심 되지 않는다. 그 말대로 나는 이제 강박적인 장애와 외상후 스트레스 같은걸 앓고 살고 있다. 내가 가진 은빛 벤츠의 차키에는 간단한 호신도구가 붙어있다. 반지 모양의 전기충격기, 5ml의 최루 가스 스프레이, 누르면 커다란 경적소리를 내는 사이렌. 나는 집안에서도 이걸 내 몸에 반드시 가지고 있었고 집안에는 이런 휴대용이 아니라 정말 제대로 된 호신용품을 곳곳에 설치해놨다.
나는 매일, 매일, 매일, 매일, 매일..........집안의 모든 창문과 문이 잘 닫혔는지를, 커튼이 잘 드리워져 있는지를 확인한다. 내 뒤통수를 치고 간 그 빌어먹을 자식이 누구였건간에 혹시 나를 완전히 끝장내지 못해서 끝장을 보려 하거나, 아니면 나를 뒤통수 쳐놓고 챙긴 수입이 짭짤하다고 느껴 또 다시 나를 찾아올까봐 그렇다. 이제 내 하루는 정말 재미없다. 이전에 알고 지낸 사람들은 내가 9시 뉴스에 속보로 전해지자 나를 걱정하면서도 서서히 나에게서 멀어졌다. 참 얕궃다.
인간들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쓸모없는지 그제서야 알았다. 이전에 나는 정말 유쾌하고 해맑고 햇살 같이 따뜻했는데 지금은 그냥 이 모양 이 꼴이다. 나는 내 스스로에게도 굉장히 실망하고 있었다. 내 주변 관계라는게 이렇게 얕고 한심했는지 정말 몰랐다. 아, 한 사람 있을지도. 진정 내가 힘들 때 나를 알아주던 사람은.......하지만 더 생각하지 말자 여하튼 아쉽게도 지금 당장 이 순간에 그런 사람은 내 곁에 없다.
그렇다, 이 넓다란 집과 조상 대대로 물려 내려온 거액의 유산을 가지고 홀로 방치되어 있다. 지금 바로 이곳 뉴캐슬롯 3번가의 100년 넘은 고상한 주택에는 안나 아렌델의 지루하고 재미없는 일상이 반복된다. 나는 그저 창문에 기대거나 그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 책을 보거나 티비를 보거나 아니면 그냥 낮의 뉴캐슬롯 3번가의 거리를 구경한다. 회사에 다닐 동안은 잘 못 보던 풍경들이다. 아침 일찍부터 아이들을 챙겨 스쿨버스에 태우는 부모들, 쓰레기차나 이따금 지나가는 프리첼이나 아이스크림, 타코를 파는 푸드 트럭. 잠시 후면 아이들 몇 명이 자전거를 타고 질주하고 스쿨버스가 다시 돌아온다. 또 늙은 노부부 올슨네가 서로를 부축하면서 산책을 한다. 올슨 씨는 외출을 할 때면 늘 말끔한 정장 차림에 페라도를 쓰고 있다가 나를 보면 페라도를 벗어 지팡이를 쥔채 인사한다. 올슨 부인 역시 올슨처럼 차려입은채 그 옆을 지키며 나에게 꾸벅 인사를 한다. 그럼 나도 손을 흔든다. 저 늙은 노부부 정도가 유일하게 이 동네에서 나를 신경써주는 나의 유일한 지인이겠지.
그 밖에도 많다. 정면에서 대각선. 12번지에 있는 미쉘이 부동산 중개업자의 겉보기만 치장한 남자와 바람을 피고 있다는거나, 옆옆에 있는 10번지의 배불뚝이 밥은 내 상상보다 배달 음식을 더 먹는다거나.......그런 것들? 아쉽지만 그 사람들 모두 이름이나 얼굴은 알아도 딱히 나랑 가까운 사람들도 아니었다. 그냥 지켜볼 뿐이지.나는 집안에 처박혀 있는게 답답해지면 정문보다는 뒷뜰에 있는 후문으로 나가보고는 한다. 그것도 집 밖을 멀리 나가지는 않는다 절대로! 그저 후문을 열고 그 근처만 살짝 서성일뿐.
때가 딱 됐나보다. 고양이들은 시간을 인지한다는 말을 어디서 들어본적 있었는데 그게 진짜인 모양이다. 뒤뜰에 있는 울타리 위에 검은색의 얼룩 고양이가 나를 보더니 야옹-거리다가 폴짝 내려온다. 고양이답지 않게 애교 덩어리다. 몇 번 우유나 참치캔을 줬었는데 그 이후로 이 녀석은 내 집에 이 시간쯤이면 간식 나오는 집이라고 생각하는거 같았다.
"미안한데 이제 먹이는 못 줘."
길고양이 같지만 애교 많고 사람을 겁내지 않는거 보면 이 근방 어딘가의 주인 있는 고양이다. 증거로 목 근처에 방울처럼 채워진 이름표에 '케이트'라고 적혀있다. 케이트는 우리 집 후문의 발치까지 와서 나를 한 번 올려다보고 미야옹 거리면서 잔디 밭에 몸을 뒹군다. 영악한 녀석! 이런식으로 아무리 유혹해봐도 이제 간식은 못 준다고! 나는 마음이 약해지려다가 다시금 붙잡았다. 내가 힘들게 돌아서며 후문을 닫자 케이트는 애달프게 먀옹~거린다. 금방 포기하겠지.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 룸메이트가 털 알레르기가 있다고 했거든.
마침 핸드폰 벨소리가 시끄럽게 울린다. 케이트를 거절할 좋은 명분이 생긴 기분이라 케이트도 자신에게 관심을 줄 수 없다는걸 이해해주겠지. 안나는 그러면서도 즉시 핸드폰 발신자가 누구인지를 확인한다. 모르는 번호. 하지만 개인 연락처라기 보다는 지역번호가 찍혀 있는게 기업 전화 같았다. 모르는 전화에게는 괜한 설렘을 가진다. 안나의 오래된 버릇이다. 다시 언니가 연락해줄지 모른다는.......
안나는 잡생각이 퍼지기 전에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네, 안나 아렌델입니다."
핸드폰 너머에서 친절한 솔톤의 서비스 멘트를 하도 날려댄거 같은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반갑습니다 안나 아렌델 씨. 머더웰 부동산 그룹의 제시라고 합니다. 일전에 연락 주신 것에 대한 확인차 다시 연락 드립니다. 시간 괜찮으신가요?"
뭐지? 언제 연락을 했다는걸까? 나는 그런 사고를 당한 이후에 누구와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몇몇 짧은 인연의 사람들과 주고 받기는 했지만 그게 전부다. 그것도 병원 생활에서 회복되는 기간쯤이고 완전히 회복하여 퇴원한 이후 집으로 와서는 핸드폰은 사실상의 디지털 시계로 전락한지 오래였단 말이다.
"예.......뭐, 그랬을거에요."
"그랬을거라니요 본인의 계약이신데. 지난주에도 확인 전화를 나눴잖아요."
제시가 쿡쿡거리며 웃자 나는 적당히 얼버무려서 말을 이어가봤다. 보통이라면 바빠 죽겠는데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하면서 당장에 끊어버렸지만 요즘 내가 외롭긴 했나 보다.
"우편으로 열쇠가 도착했을 겁니다! 도어락을 바꾸는건 나중에 개인적으로 비용을 내셔서 하셔야 하기 때문에 원하신다면 바꿔드릴 수 있겠지만 아직은 이른 감이 있죠. 하여튼, 임대 이후 반년치 월세를 내셨고요. 당장 열쇠가 도착하시고 나면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아직 완벽하게 마무리 된건 아니지만 마무리 작업이 끝나고 있으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염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제시라는 여자는 재잘재잘 떠들었다. 듣는 내내 나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지만 우선 적당히 대답해가며 대화를 끝내고 전화를 종료했다. 우편물이 올거라고? 나에게? 나는 기억을 더듬어봤다. 내가 진짜 요 근래 한 달 사이에 뭘 했더라? 의사들은 나에게 머리를 다쳤으니 후유증이 있을 수 있다고 했는데 그런 것중에 하나일까? 나는 즉시 현관문으로 다시 나갔다. 우편함까지 별로 멀리 있지 않지만 최근에 여기까지 나와보기도 참 오랜만이다. 우편물을 열자 'M.P.H'라 적힌 봉투가 하나 들어있었다. 봉투를 꺼내들고 즉시 집으로 들어온 이후에 커트칼로 개봉부를 뜯어 당장 열어보았다. 정말 방금 한 전화처럼 열쇠 두 개가 걸려진 고리와 함께 깔끔한 필체의 안내문이 들어있다.
반갑습니다 안나 아렌델 씨.
머더웰과 함께 함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저희는 언제나 여러분을 위해 최선을 다 할 것이며 어떤 고충이든 듣고 도움을 드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뉴캐슬롯의 멋진 풍경이 들어오는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화려한 시작과 행복을 누리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머더웰 소속, 뉴캐슬롯 전담 소속 팀.
고맙게도 뒤쪽에는 내가 계약한 집으로 오는 약도까지 간단하게 그려져 있다. 팜플렛과 안내문을 집어치우고 나는 심각한 고민과 충격에 빠졌다. 뭐지?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절대 아니다! 내가 아니면 누구야! 누가 대체 나를 대신해서 이런 계약을 해놨냐고! 잘못된 착오일까? 근데 제시는 쿡쿡거리며 마치 나와도 이전에 통화한듯 자연스러웠다. 그건 절대로 판매 스킬이나 장사꾼으로서 경험 같은게 아니었다. 안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손이 살짝 떨리며 이 모든 일에 대한 원흉이 딱 하나만 떠오른다.
나를 습격했던 그 자식이 분명하다! 그 자식이 훔쳐갔던 지갑에서 내 개인 신상 정보를 모조리 파악해다가 어딘가 싸구려 웹 사이트라던가 다크팜에 넘겼다던가 그런 것이 분명했다! 아니면 본인일지도 모른다. 어찌됐건 그 방법 뿐이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나를 습격한 놈이 나인척 내 신분을 도용하고 있거나
내 신분을 훔쳐서 팔았고 그걸 산 놈들이 나인척 하고 있거나.
뭐가 됐든 이건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나를 습격한 사람을 붙잡을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 아무리 이 나라 치한이 선진국인데 비해 심각하게 떨어진다지만 그 녀석을 못 잡은건 상당히 억울했었다. 붙잡아다가 반드시 날 괴롭게 한 책임을 묻게 해주지!
저녁 7시쯤.
우리 집의 2층에 세들어 살고 있는 한스가 돌아왔다. 나는 일부러 저녁을 먹지 않고 느즈막하게 기다리던 참이었다. 딱 마침 시간을 재놨던 오븐에 애플 파이를 꺼내들자 파이 향기가 온 집안에 가득찬다.
"냄새 좋은데요? 저녁인가요?"
"맞아요."
한스는 밝은 미소로 다가와 정겹게 묻는다. 나는 그런 친절함이 좋았다. 한스는 또렷한 이목구비에 섹시한 갈색 머리를 하고 있었고 직업은 의사였다. 이렇게 완벽할수가! 의사, 검사, 판사.......하여튼간에 현대 시대의 왕자님들 같은 이상적인 직업 아니겠는가. 한스는 자신이 다니는 병원의 출입증을 목에 걸고 두툼한 가방을 들고 있었다. 나는 일부러 관심 없는 척 하면서 툭 던져본다.
"식사 하셨어요? 막상 해놓고 보니까 양이 많아서요."
나는 방금 꺼낸 파이를 식탁 위에 내려놓는다. 식탁에는 어차피 샌드위치라던가 사과나 딸기 같은 과일들. 그거 말고도 남은 고기를 양파랑 적당히 볶아낸 팬도 놓여져 있었다. 한스는 내 의도를 알아챘는지 따뜻하고 인자하게 웃는다. 자신의 환자들을 달래주는 미소겠지. 굳이 따지면 나도 환자였기에 그런 미소에 마음이 풀려버린다.
"좋아요. 샤워만 끝내고 바로 올게요."
한스는 금방 자신의 2층으로 올라갔다. 그 동안 나는 조금 바쁘게 2인분 커틀러리를 셋팅한다. 식탁보 위에 그의 접시와 포크, 나이프를 놓아두고 물잔도 하나. 와인 글라스도 하나. 어차피 미리 꺼내놨지만 대놓고 둘의 식사를 준비한게 아니라 내가 초대를 했고, 응했으니까 그제서야 준비한척 연기를 하는 것이다. 우리 관계는 절대적으로. 100프로 플라토닉했다. 서로 간섭하지 않았으며. 신체의 접촉이라던가 따위 일절 없었다. 우리는 완벽한 세입자와 임대인이었고, 집주인과 손님 정도의 비즈니스 관계라고 할 수 있었고. 그보다 조금 더 부드럽게 표현하자면 오래된 친구 정도면 딱 알맞을 것이다. 그냥 적당히 유사 연애를 하는 그런 관계다. 우리 둘은 서로가 싫어할만한 대립이 될 수 있는 주제는 입에 담지 않는다. 정치, 사회, 종교 같은 것. 또한 너무 깊은 사적인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그저 서로가 한 집에 있다는 사실. 그것만 중요하다. 그래도 그와 있으면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부터 보호되고 있다는 기분이었고 나에게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에 안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사람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더 받는건 너무 복잡해질거 같았고 딱 한스가 알맞다.
잠시후 은은한 비누향을 풍기며 편한 옷차림으로 갈아입은 한스가 내려왔다. 우리는 식탁에 서로를 마주보는 위치로 앉아 식사를 시작한다. 특별히 많은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나로서는 그 편이 조금은 아쉽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안도한다. 우리 관계가 딱 이렇게 선 그어진채로 더 이상 깊이 얽혀가지 않기를 바라고 있기도 하다. 그랬다가 내가 잃어버린 내 지인들처럼 한스를 잃어버릴까 싶어서.
"오늘 잘 지냈어요?"
한스가 나에게 묻는다.
"그냥요. 다름 없죠."
한스는 몇번 깜박이며 나를 주시한다. 의사라는 그도 내가 앓고 있는 증상들에 대하여 알고 있다. 이쪽 관련 전공은 아니라 전문 지식은 덜할지라도 그 역시 의사니까 나에 대하여 뭔가 판단을 하고 있을까? 가벼운 진찰 정도일지도 모른다. 내 상태가 어떤지에 대하여. 하지만 그런 관찰이 나에 대한 경계심이나 미친 여자 보는듯한 낯선 것이 아니라 나를 아끼고 있는 것에 대한 표시임을 알기에 그 관심이 괜찮다.
"하여튼 다행이에요. 당신이 없으면 아마 오늘 저녁도 맥도날드겠죠. 아니면 도미노 피자?"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나는 바보 같이 말을 아끼려 한다. 덤벙대며 말실수를 하거나 괜히 이상한 낌새를 만들 여지를 주기보다는 이 정도가 낫겠지 싶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오래전 나로 한스를 대하고 싶다. 말괄량이 같고, 우스갯소리 잘하고, 넉살 좋고, 밝은 모습의 나로서 말이다. 아쉽게도 지금의 나는 그렇게 밝을 힘도 없고 이제는 그런 나를 완전히 잃어버린 기분이다. 식사는 금방 끝난다. 그게 아쉽다. 나보다 빨리 비운 한스는 먼저 일어나서 빈 식기들을 싱크대로 가져가서 물에 담궈두고 소매를 걷어올려 서슴없이 맨손으로 수세미를 붙잡는다. 나는 그 속도에 맞춰서 식사를 끝냈고 어느새 한스가 다가와 내 식기들까지 챙겨간다. 식기를 들며 내 앞으로 다가온 한스는 나를 보고 말 없이 인상 좋고 가지런한 이빨이 돋보이게 씨익 웃는다. 뭐야, 무슨 연인이라도 되는거 같잖아.
그럼 나는 비어있는 식탁보에 떨어진 다른 음식들을 행주에 감싸 쓰레기통에 버리고 식탁을 말끔히 닦아놓는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배려할줄 알았고 서로가 서로에게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알았다.
"올라가볼게요. 무슨 일이 있으면 알려줘요."
"무슨 일이 있긴요."
"걱정되서 하는 말이에요."
"일찍 잠드네요."
나는 다시 또 무심한듯 건넸다. 그냥 단순히 티비라도 보면 안될까? 아니면 그냥 살짝 배가 꺼질 정도만 같이......하, 역시 그런 말은 할 수 없다. 말했지만 우리는 서로를 배려하고 서로의 선을 안다.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내일 아침에도 바쁜 수술 일정이 잡혀 있거든요."
그런 내 갈등을 단칼에 자르듯 한스는 손에 묻은 거품들을 말끔하게 씻어내어 탁탁 털어낸 이후에 자기 티셔츠에 앞뒤로 문질러 닦으며 나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식탁 위에 올려둔 그의 핸드폰을 집어들고 그는 성큼성큼 다시 부엌을 나가 계단을 올라가버린다. 걱정이라고? 그래, 걱정 받아야지. 요즘 나는 누군가에게 굶주려 있다. 그걸 무슨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그냥 말 없이 포기하고 안겨버리고 싶은 그런 충동. 하지만 마냥 약할 수 없지. 이래뵈도 나는 꽤 강단 있는 사람이다! 한스가 2층의 세를 준 방으로 사라지고 나는 즉시 내 할 일을 시작했다.
작전을 시작하기에 앞서 나는 우선 저녁을 경계했다. 늘상처럼 현관문을 시작으로 1층 곳곳을 돌며 창문들을 점검한다. 아무 이상 없다. 어디에도 빈틈은 없었다. 2층으로 침입할 수 있겠지만 2층도 마찬가지로 빈틈 없을 것이다. 게다가 거기에는 한스가 있으니까! 그런 다음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서 긴장되는 마음에 이것 저것 찾아 웹 상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요즘에는 나에 대한 정보가 서류뭉치로 철제 서랍에 담겨져 있는게 아니라 이 작은 사각형속에 전부 기록되어 남아 있다.
당장 나의 신용상태를 파악하기 위한 신용조회를 해본다. 내 신용 등급은 여전히 2등급으로 아무 탈이 없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나는 내 계좌를 확인해봤다. 잃어버린 신용 카드가 긁어져 멋대로 빠져나간 돈도 없었다. 내가 늘 기록하는 가계부처럼 그대로 남아 있었다. 좋아, 지금 내 이름으로 반년치 월세를 계약한 자식은 내 신분은 도용하고 있지만 내 깊숙히 파고들지는 못 했다! 어쩌면 잃어버린 카드를 쓰면 금방 덜미가 잡히니까 신중한 것일지도.
안나 아렌델.
내 이름은 흔해빠졌다. 교과서에 나올 정도로 터무니 없이 많고 많은 안나들중에 하나이다. 하지만 아렌델이라는 성은 특이하지. 나는 동명이인을 찾는 모든 사이트를 뒤적이며 안나 아렌델을 검색해봤다. 녀석이 쓸데 없이 내 신분을 도용하고 있다면 어딘가에 가계정이 만들어져 있지 않을까? 나는 7가지나 되는 사람 찾기 사이트와 온라인상에 회원가입한 목록들을 뽑아주는 웹 사이트를 뒤적였지만 안나 아렌델이라고 해봤자 아렌델은 코빼기도 있지 않고 안나들만 쏟아져 나왔다. 그중에서 몇가지 눈에 띄는 것들은 발견했지만 이런건 나조차 까먹고 있던 오래전의 내가 가입한 사이트들이다. 망할, 이참에 정리하면서 탈퇴할 사이트는 탈퇴하자고.
1차 작전에서는 별 소득이 없었다. 나는 관자놀이와 이마를 문지르며 잠깐 자리에서 일어나 와인 냉장고를 뒤적였다. 음.......아니지, 지금은 와인보다는 그냥 복숭아 리큐르나 한 잔 하자. 조금 달짝지근한게 도움이 될거 같으니까. 복숭아 리큐르를 샷잔에 담아 그 자리에서 살짝 한 모금. 그리고나서 다시 소파로 와서 한 모금. 잔을 옆에 두고 2차 작전을 시작해본다.
가명으로 위장한 놈을 찾는게 단순히 검색 조금으로 될줄 알았던 내가 오산이었다. 경찰에 신고하거나 할 수 있겠지만 아마 그들은 쉬쉬하며 되려 나를 설득하려 들게 뻔히 보였다. 이런 일이 흔해빠진 세상이다. 거기다 경찰 같은 공권력은 느려터져서 아마 그치들이 뭔가 결과를 낼 쯤에는 반년치 월세에 또 반년치가 계약됐다며 전화가 올지도 모를 것이다. 아파트 계약조차도 임차인에게 이름과 서명, 은행 잔고 증명서등 간단한 절차 조금이나 아니면 대놓고 현금 박치기로 박아버렸다면 손쉽게 풀려버릴 일이다. 그러니까 나한테 전화를 준 머더웰에게 왈가왈부 따져도 그들 입장에서는 어쩌라는거야? 이런 반응일게 뻔했다. 우리는 이미 돈 받았거든? 그런건 경찰에게 따지셔. 그런 푸대접이겠지.
그래, 내 인생은 내가 지켜야 한다! 엘사가 떠나고 나서 그렇게 다짐했잖아!
........
엘사라면 좀 더 현명한 방법을 찾았을려나? 아니면 엘사랑 붙어 있었다면 그런 날치기 강도짓에 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
"망할, 안나 집중해! 지금 그게 문제야?"
나는 혼잣말을 내뱉으며 두 뺨을 찰싹 때렸다. 좋아, 다음은 SNS라고. 나는 평소에 SNS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인스타그램이든 페이스북이든 트위터든 뭐가 됐든지! 복잡하기도 해보이고 뭐 유난이라고 그렇게 사진을 찍어다가 남들 보라고 올리는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내가 유명 스타야 뭐야? 하여튼간에 말이다. 나는 무작정 페이스북을 켰다. 아마 내 알기로 사용자가 제일 많다.
검색창에 '안나 아렌델'을 누르고 기다린다. 검색 결과가 쏟아져 나온다! 망할 안나! 이름이 안나가 아니라 음......안나르크? 이런 세상에 둘도 없을 이름이면 좀 좋아? 안나들 투성이야! 온 세상이 안나 천지라고! 나는 내려도 내려도 끝이 없는 수 많은 안나들에게 역정을 냈다. 망할 포기! 이거는 안될 방법이야.
나는 이전에 했던 것처럼 안나로는 포기해버리고 이번에는 '아렌델'만 눌러보았다. 이렇게 해도 몇 가지나 연관 검색어가 나온다. 철자와 발음이 비슷한 것들.
아린델, 아리델, 에렌, 아린........이딴 시스템을 만든 자식을 쥐어패주고 싶다. 마크 주커버그 개자식!!!!
그래도 안나보다는 덜했다. 다시 한 번 더 페이지 끝을 새로고치고 스크롤을 내린다.
........!!!!!!!!!!!!!
뭐야!
나는 깜작 놀라서 손으로 입을 막았고 하마터면 핸드폰을 놓칠 뻔했다! 안나 아렌델이라 똑똑히 적힌 이름과 프로필의 작은 정사각형에 내가 있다! 아니 정확히는 나를 빼다 박았지만 내가 아니다! 사진속의 여자는 나와 똑같은 연갈색 머리를 내가 즐겨하는 꽈배기처럼 짧게 말아올린 머리를 하고 있었다. 또 내가 좋아라하는 연두색의 가디건을 입고 있었고 살짝 옆모습으로 흘기며 웃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사진은 찍은적이 없다! 애초에 저 가디건은 나랑 비슷하지만 전혀 다르고 내 옷장에 저런 옷은 없다고! 애시당초에 나는 SNS자체를 한적이 없었다고! 나는 즉시 안나 아렌델의 프로필에 접속했다! 곧 이어 타임라인에 걸린 몇가지 사진들이 나온다! 나랑 비슷하지만 내가 아닌 사진! 누구야, 망할! 대체 누구냐고! 자기 소개에는 한 마디 문구도 없다. 오직 딱 하나 뉴캐슬롯 다운타운의 홍보대행사에서 일한다는 것만 적혀 있다.
내 회사잖아! 다행히 어느 회사인지 이름까지 밝힐 용기는 없었나봐?
나는 어쩌다 잡혀버린 실마리에 너무 흥분해 있었다. 단번에 방금 따른 복숭아 리큐르를 비워버리고 손을 흥건히 적신 땀을 소파와 옷에 박박 문질러 닦는다. 다음 친구창! 나는 화면이 넘어가는 대기 시간 동안 금방 눈가까지 흐른 땀을 훔쳤다. 친구창은 다행히(?) 비어있었다. 다분히 최근에 만들어진데다 관리는 똑바로 하지 않는 프로필과 계정이다! 한 마디로 내 신분으로 만들고 오래 지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진정이 되지 않는다!
월세를 계약하고, SNS계정을 만들어 히히덕거리고.
누군가 나로 살아가려고 작정을 했다!
야금야금 나를 뺏어가면서!
하지만 너무 자만했어. 이렇게 쉽게 덜미를 내주는게 석연치 않기는 했지만 어쨌건 잡았다! 두고보자고, 감히 어떤년일지 놈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인척 하는 이 사람을 잡고 나면 다시금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있을거라는 확신이 든다! 범인이 누가됐든 꽤나 나에 대해 알고 있는 놈이다.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이 녀석에게 스토킹 당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제부터 반대로 해줄 것이다. 내가 나를 스토킹하는 꼴에 녀석이 뿌려둔 함정일지도 모르지만.
어릴 때 나는 모든걸 엘사에게 의지했다. 엘사가 나보다 훨씬 뛰어나다는건 둘째치고 나에게 있어서 언니의 존재는 정말 커다란 우산 같아서 그 아래에 있으면 아무 힘들일 필요도 없었고 아무 걱정도 없었다. 엘사가 가는 방향은 언제나 올바른 길이었고 엘사가 하는 것들은 언제나 정답이었다. 이를태면 그때 나는 감나무 아래에서 천하태평으로 입만 벌리고 있는 여우였을려나? 나에게 있어 엘사는 완벽한 존재였고 그런 엘사에게 시기질투하는 마음보다 더 큰건 동경하다 못해 사모하는 마음이었다. 그때는 그 작은 불씨를 몰랐다. 나는 그저 언니를, 엘사를 너무 사랑하고 잘 따르는 순종적이고 착하고 살짝 부족해 칠칠 맞은 동생이었다.
"언니가 하는 말을 들으라니까."
엘사는 내가 뭔가 사고를 치거나 하면 늘 그렇게 나긋나긋하게 타일렀다. 머리를 빗어주면서 혹은 옷 매무새를 고쳐주면서, 훌쩍이는 눈물을 닦아주면서. 지난밤 엘사가 나오는 꿈을 꾸었다. 큰 사건을 겪고 차차 회복되어가면서. 그리고 이제는 큰 일전을 앞두고 있으면서 불안함에 시달리고 있던거 같다. 이른 새벽에 떠진 눈은 쉽게 감기지 않았다. 엘사는 꿈에서까지 나를 나무랐다. 엘사는 머리 뒤통수를 꼬맨 흉을 손으로 어루만져주었다. 꿈속이라 그랬지만 그러자 씻은듯이 통증이 가라앉았다. 나는 살짝 고개를 돌려 머리 뒤를 만지작거렸다. 명확히 남아 아직 다 가라앉지 않은 흉자욱. 조금 쎄게 만지면 여전히 머리가 지끈거린다. 나는 1층의 안방 침대 위에 홀로 있었다. 이제는 쓰지 않는 과거의 벽난로에는 불대신 그럴듯한 조명이 들어가 있어서 아주 밝지는 않은 수면등 정도의 주홍빛으로 방을 밝히고 있었다.
'언니라면 어떻게 할거야?'
나는 괜히 속으로 질문했다. 사실 나에게 하는 말이다. 나는 혼자서 이중인격인 마냥 대답도 해줬다.
'네가 원하는대로 해.'
꿀꺽- 어째서 이 말이 떠올랐지. 동시에 내 아래에 누워서 슬쩍 고개를 돌리는 엘사의 모습도.
맞아, 나는 원래부터 내가 원하는대로 해왔어. 스스로 엘사에게, 나에게 질문하고, 스스로 나에게 엘사가 답하고, 다시 스스로 결정한다.
'그럴거야.'
또 다른 나와 승부를 벌이기 전에 나는 이것저것 준비해야할게 많았다. 그 사이에 나는 꽤 큰 편두통을 느끼며 주춤거렸다. 확신이 없고 불안감만 가득한 '또 다른 안나'와의 싸움이 막막하게만 느껴져서 이것저것 좋은 수를 떠올리려 해봐도 쉽지 않다. 게다가 강도 사건 이후로 나는 너무 약해진 상태다. 날씨 또한 도와주지 않았다. 며칠 사이에 비 오는 날이 계속됐다. 이러면 나로서는 완벽히 불리한 전개다. 결국 나는 심해지는 편두통과 막막한 전략을 갈고 닦기로 하며 재정비를 해야했다.
간 밤에 악몽을 꿨다. 꿈 내용이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또 다른 나와 싸우는 꿈이었다. 느낌만 어렴풋이 남았는데 내가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었다. 뭔가 희뿌연 안개속에 있던거 같기도 하고 물속에 풍덩 빠져서 꼬르륵하며 추락하고 있는 느낌이기도 했다. 여하튼 그렇게 두루뭉술하게 알 수 없는 세상에서 나는 끝 없이 가라앉고 멀어졌고 또 다른 나는 내가 사라진 빈자리에 떡하니 자리잡았다. 마지막은 또렷하게 기억하는데 내가 소리를 지르려 했다. 목이 터지라고 긁어가며 소리치려 했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일어났을 때 내 목덜미를 할퀸 자국이 남아있었다.
망할, 창문을 때리며 후두둑하는 빗소리가 들린다. 나는 침대에 일어나 앉아 상체를 구부려 손을 뻗어서 살짝만 커튼을 들춰보았다. 새벽의 어두컴컴한 하늘은 먹구름 낀 비 때문에 더 우중충했다. 이따금 먼 곳에서 쾅! 하고 내리친 천둥소리가 들려온다. '또 다른 나'로 인해서 내 몸은 다시 극도의 스트레스와 신경과민으로 날이 바짝 서 있었다. 덕분에 내 몸도 더더욱 빨리 피로해졌고 체력도 일찍 소진된채 회복은 더딘 기분이다. 어제 저녁에도 약을 먹고 잠들었더니 두 눈 사이가 엄청나게 무겁고 뭔가 끈적한걸로 묶어 둔 것처럼 지지부진했다. 나는 눈꼽을 적당히 비벼 떼고 핸드폰을 켜서 시간을 확인했다. 약 먹고 9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나는 메모장 어플에 약 먹은 시간을 정확히 기록해둔다. 의사가 말하길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단기간에 복용하고 그게 반복되면 결국 내성으로 약의 효력은 사라지고 그 이상을 바라며 끝도 없이 가다가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누누히 경고했었다. 나는 그 경고를 상당히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그런 삶은 마약중독자나 다름 없잖아. 참아야했다. 못해도 12시간은 넘겨야지.
나는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찬물로 가라앉히고 마음을 붙잡은채 다시 돌아와 남은 잠을 마저 자기로 결정했다. 힘들게 옮기는 걸음걸이마다 머리가 쿵쿵 흔들려서 거의 흐느적흐느적 기어가듯 발을 질질 끌었다. 매일 매일 모든 창문과 커튼을 완벽하게 닫아놓은 덕에 사방이 어둠속이다. 나는 그 속에서 벽지도 한 손으로 짚어 방향감각을 유지했다.
힘들게 부엌에 다가와 나는 물병을 움켜쥐었다. 제길, 컵. 컵이 어딨더라? 아 젠장! 싱크대까지 또......
나는 그냥 물병을 열어서 벌컥 벌컥 마시고 말았다. 다시 방문으로 돌아가려는데 머리가 피잉- 하며 돌아간다. 어? 왜 이러지? 다리에 갑자기 힘도 휙 빠지며 휘청였다.
"안나!"
어두컴컴한 부엌 문간에 누군가 있었다. 나는 갑자기 나타난 괴한에게 적대심을 느낌과 동시에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또 다른 안나야! 이번에는 나를 끝장내려고 온거였어! 꿈이 아니었던가!
나는 벌벌 떨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괜찮아요? 안나! 집에 있어요. 지금은 안전해요. 상태를 살피러 온건데.......얼른 다시 자도록 해요."
익숙한 목소리.
한스였다.
부드러운 손길로 그가 나를 부축해 일으켜준다. 나는 아무것도 하는거 없이 비척비척 걸을 뿐이다. 모든건 그가 대신해줬다.
다시 일어났을 때는 아침이었다. 살짝 늦은 토요일의 오전. 아직도 정신이 몽롱하지만 편두통이라던가 몸에 힘이 없다던가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말끔히 깨어났다. 평소보다 잠이 많아서 잠에 취한 정도에 불과했다. 약을 이중으로 먹었던가 아니면 짧은 시간에 두 번 복용을 한 것일까? 흠, 뭐가 됐든 실수가 있었던거 같다. 이틀내리 잠만 자면서 보냈다. 부족한 식사와 과도한 약과 함께. 말끔하긴 했지만 기력은 거의 없는체로 샤워를 끝냈다. 이틀 사이에 배어 있는 몸을 닦고나니까 한층 더 좋아지긴 했다.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고 부엌으로 간다. 나는 앞으로 식사를 거르지 말자고 단단히 마음먹고 있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한스가 손에 커피포트를 들고 있다. 포트에서는 팔팔 끓는 물이 김과 함께 모락모락 쏟아지고 있었고 한스는 나에게 잠깐 시선을 줬다가 세밀한 물 조절을 위해 커피에 집중했다. 그는 자신이 공 들여 방금 만든 머그잔을 나에게 건넸다.
"고마워요."
나는 커피 크림과 설탕을 한 티 스푼 넣고 식탁에 앉았다.
"이번 주말은 비번인가요?"
사실 알고 있다. 그가 격주로 한 번씩 주말에 쉰다는걸. 알고 있지만 물어보는거고 나는 이내 그 질문을 후회했다. 멍청하게 관심을 표하고 없는 물꼬를 트려고 하는거 같아서. 사실 그것뿐이 아니라 그가 언제쯤 집으로 오고 나가는지 훤히 알고 있다. 한 동안 내 집에 틀어박혀서 살고 있고 우리집에 있는 세입자라고는 한 명인데 그걸 못 기억하면 바보게? 내심 정리되지 않고 있던 속마음이 덜컥 나왔는지도 모른다. 별거 아닌 안부처럼 물었지만 한스는 똑똑하니 내 말속에 숨겨진 의미도 넌지시 전해졌다는걸 알지도 모르겠다.
부엌의 식탁 맞은편, 카운터에 기대 선 한스는 나와 마주보며 씨익 웃었다.
"맞아요. 오늘은 뭐 할 건가요?"
나는 뜨거운 커피를 입바람으로 호호- 불면서 살짝 마신다.
"밀린 집안일이요. 먼지 털고, 청소기 돌리고, 빨래도 하고."
나는 잽싸게 빨래를 얘기할쯤 입을 다 물었다. 이게 뭐하는거야 얼간이 같이! 내 재미없고 무미건조한 대화에 나도 깜작 놀랄 정도로 질려버린다! 한스가 좀 더 배려심 없고 조급하거나 아니면 조금이라도 나를 이상한 괴짜처럼 생각했다면 "아, 네에. 수고하세요." 이러고 도망갈지도 모른다. 다행히 한스는 내 얼간이 같은 말에도 친절히 웃어주며 끅끅거린다.
"하긴 그렇죠. 집에서 제일 중요한 일들 아니겠어요."
볼수록 착한 사람이다. 나는 사고 이후 세입자를 받기 전에 면밀히 검토했다.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일지 말이다. 받아진 신상정보나 과거의 행적들 따위를 잘 따지는건 물론! 내가 여태까지 살아온 감각을 총동원해서 이 사람은 어떤 타입의 사람일지를 사전에 충분히 걸러내고 걸러내서 받은 사람이 한스란 말이다! 그렇기에 한스를 질려버리게 만들어 이 집에서 도망치도록 만드는 일은 없어야 한다. 다시 또 혼자 남겨진다면.......
여태까지 살면서 이렇게까지 엘사가 그리운적이 없었는데.
"당신은요?"
그보다 나는 한스와 대화가 툭- 하고 끊어져서 어색해지기 전에 금방 다시 되물으며 대화를 억지로 붙잡았다.
"글쎄요. 당장은 계획 없지만 나가볼 생각이에요."
"누구를 만나나요?"
나는 괜한 긴장감으로 콩닥거렸다. 여자친구? 애인? 그런 사람은 없기를 내심 기도한다. 나는 너무 말라버렸고 한스가 유일한 사람이다.
"그냥 친구요."
아-! 안도할 수 있다. 친구라니. 의사 친구들일까? 한스 같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은 언제나 밝고 유쾌하겠지. 나도 그런 자리에 끼는 사람이었는데. 순간 더 못 참고 자세히 어떤 친구냐고 물어볼 뻔했다가 겨우 억눌렀다."
"안나 씨도 친구가 있잖아요."
"아니요. 저는 별로. 제가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닌가봐요."
"그럴리가요. 일단 세입자라서가 아니라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월세를 깎아달라고 하기 위해 아부하는거 아니에요."
"당신이라면 깎아드릴 수도 있어요. 의사 봉급에 쉽지 않죠?"
한스의 별거 아닌 농담에도 나는 최대한 크게 반응해줬다. 내가 은근한 반어로 되받아치자 한스가 어깨를 으쓱한다. 이런 대화가 좋다! 또 그가 나에게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준게 기분이 좋다! 나는 방금까지 갈팡질팡 콩닥거리고 있던 긴장들도 싹 가시는걸 느꼈다. 이참에 감사 인사도 해야겠다. 그러던참에 띵! 하고 토스트기의 알림소리가 울리며 식빵 4개가 찰칵! 하는 스프링 소리와 함께 튀어오른다. 한스는 곧장 토스트키로 돌아서서 접시 위에 두 개씩 얹고 버터를 꺼낸다.
"어제밤에 고마웠어요. 괜찮은지 살펴줘서요. 당신이 없었다면 아마 제 후유증이 또 심해졌을지도 몰라요."
한스는 내 앞에 접시 하나를 놓으면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표정만으로도 나는 내가 뭔가 틀린 말을 했나? 하고 의구심을 품었다.
"어제요? 제가 어제 뭘 했었나요?"
"어지러운 두통이 심해졌는데 당신이 저를 봐줬잖아요. 그리고 침대까지 다시 부축해줬는데."
한스는 자신의 이마에 대고 검지손가락을 긁적이고 톡톡 때려본다. 그러다가 여전히 모르겠다는듯 고개를 절레 절레 내젓는다. 나는 한스가 장난치는건가 싶어서 다시 확인한다.
"어제 그랬잖아요. 아니 그제일까? 오늘 새벽일까요? 여하튼요. 바로 여기 부엌쯤에서요." 나는 더 장난치지 말라는듯 한 번 더 강조한다. "문간에서 저를 살피러 왔다고 했잖아요."
나는 너털웃음을 지으려 했지만 급격히 혼란스러워지는 머리속에 표정까지 여유롭지는 못 했다.
"아니요. 저는 그런적이 없어요. 저는 어제 아주 늦게서야 왔어요. 당신은 당연히 자고 있었겠죠. 부엌에 가보니까 물통 하나가 꺼내져 있고 약 뚜껑이 닫히지 않고 놓여져 있길래 그걸 잘 정돈해놨어요. 그리고 곧장 잠들기 위해 제 방으로 향했죠."
한스는 부엌 식탁 위에 놓여져 있는 내 약통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약 뚜껑과 물을 보고 당신이 걱정되기는 해서 슬쩍 살피러 가긴 했어요. 근데 침실 문은 잘 잠겨져 있었고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없길래 그냥 편히 잠들고 있구나 싶었어요. 약을 먹고나서는 어찌됐건 잠드는게 일반적이니까요."
나는 끝까지 웃어보려 했지만 점점 표정이 굳고 진지해지는 한스가 더 이상 농담한다고 보기 어려웠다. 덩달아 내 표정도 싸해진다. 요즘 정말 왜 이러지? 완전히 바보가 되어간다. 자주 잊어버리고, 괜히 설레고 싶어서 혼자 망상적이고.
"나는 분명 당신을 봤어요. 제 몸을 부축해주는 느낌도......."
속이 다시 울렁였다. 아침 샤워를 끝내고 말끔해진 몸과 마음이 다시 피폐해지는 느낌이다. 나는 분명히 한스를 봤었다. 그건 다른 누구라고 설명할 수 없이 확신한다! 내가 요즘 아무리 바보 같아도 그런걸 헷갈린다고? 진짜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일까? 내 생생한 느낌은 한스의 말과 완벽히 달라서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한스가 혼란해 하는 나에게 다가와 어깨를 두드려준다.
"아뇨, 저는 아니에요. 분명 꿈과 헷갈리거나 아니면 착각이에요. 약을 급하게 꺼내는 통에 정량 이상을 먹지 않았나 생각해봐요. 그 편이 빠르겠어요."
"휴우....."
나는 흔들리는 정신으로 한스가 가리키는 약통을 똑똑히 보았다. 강도 사건 이후 처방 받은 약들........담당 주치의가 했던 경고도 스쳐간다. 기억력이나 사물을 분간하는 것이라던가 여하튼 뭔가 인지에 문제가 생기거나 변화가 있다면 조심하라고.
"시각장애의 일종인 증상일 수 있어요. 당신이 먹는 약은 조심해야해요. 특히 큰 사고 이후에 처방 받은 약이니까요. 이런건 오히려 수면을 방해하거나 착란을 일으킬 수 있어요."
한스는 내 시선에서 약통을 치워서 한쪽으로 밀어버린다.
그 말을 믿고 싶다.
믿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