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Lullaby - 45
새롭게 나타난 영혼은 어안이 벙벙한지 쉽게 말을 잇지 못하고 연거푸 주위를 둘러보기만 하고 있었다. 그 영혼의 겉모습은 늙고 추레해 보였지만, 자세히 보니 생각보다 어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디서 고생을 많이 하고 온 듯 싶었다. 저 영혼에게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저토록 겁에 질려 있을까?
“저기… 괜찮아요?”
“잘, 잘못했어요! 그게 속임수이라고는…”
“정신 차려요! 여긴 아무것도 없어요!”
“... 아냐, 아직도 난 벌을 받고 있는 거야… 날 유혹하려고 들지 마!”
“이봐요!”
엘사는 그 영혼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영혼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계속해서 몸을 움츠렸다. 어떻게는 그 영혼을 안심시키려 시도했지만 영혼은 끝까지 고개를 파묻고만 있었다.
“... 아니야, 미안해, 잘못했어…”
어휴, 엘사는 근처에서 들려오는 자책을 듣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 영혼과 대화를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차라리 다른 곳을 둘러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엘사는 고민에 빠졌다.
기억이라도 읽을 수 있으면 좋은데.
예전에 난파선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물속에 잠든 기억을 엿보고 싶었다. 그렇게 한다면 좀 더 빠르게 방법을 찾을 수 있을 텐데. 엘사는 생각했다.
끙… 젠장.
그러나 아무리 용을 써봐도 그때처럼 과거의 기억을 되살릴 수가 없었다. 나올 듯 말 듯 싶다가 끝내 나오지 않았다. 마치 벽에 걸리기라도 한 것만 같았다.
“여보, 미안해, 성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었는데…”
저 영혼은 계속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 엘사는 결국 기억을 보려는 것을 포기했다. 그 대신, 엘사는 영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다른 곳을 둘러보기 전에 잠깐 저 영혼의 이야기를 들을 시간은 있었다. 어쩌면 저 영혼이 결정적인 단서를 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이제라도 아렌델 성으로 돌아가고 싶어. 성이 지옥인 줄 알았건만, 도적들도 마찬가지였어…”
잠깐, 뭐라고?
엘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렌델이 저 영혼에게서 갑자기 왜 언급된단 말인가? 혹시 아렌델 성에 살았던 주민이었나? 엘사는 다시 그 영혼의 모습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저 얼굴… 기억나.
그제야 엘사는 그 영혼의 정체를 떠올릴 수가 있었다. 엘사 자신의 기억이 맞다면, 저 남자는 아렌델 성 외곽에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저기, 벤자민 씨!”
“...”
자신이 아렌델을 떠나기 직전까지만 해도 저 남자는 가족과 함께 오순도순 잘 지내고 있었다. 엘사 자신도 그 가정을 보면서 부러움을 가졌던 적도 있었다. 근심 따윈 전혀 보이지 않는 가정이었는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 곳에 오게 된 것일까?
“벤자민 씨, 정신 차려요!”
“... 누구야!? 누가 대체 내 이름을…헉!?”
영혼은 엘사의 얼굴을 잠시 올려보더니, 이내 기겁하면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엘사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천천히 다가갔다. 그러자 그 영혼도 기겁하면서, 이리저리 허우적대면서 엉거주춤 앉은 채로 뒷걸음질 쳤다.
“잠깐만요! 저는 그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화, 환, 환상이지?! 아니야, 죄송해요,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제발, 가족만은 건드리지 말아 주세요!”
“... 이런.”
엘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어떻게 해야 저 자를 진정시킬 수 있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무언가 떠오른 엘사는 영혼의 팔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영혼은 기겁하면서 엘사에게서 떨어지려 했다. 엘사는 얼음을 만들어서 영혼이 옴짝달싹 못하도록 잡아 놓았다.
“상왕 폐하, 제발, 무릎 꿇고 빌게요! 부디 가족만은 살아남도록, 제발… 여왕 폐하께 돌아가…”
“뭐라고요?”
엘사는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안나가 여기서 갑자기 왜 나온단 말인가? 혹시 안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다, 다시 말해 주세요. 안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예요?”
“... 아냐, 난 분명 죗값을 치르고 있었어. 이것도 그 과정인 것이 분명해…!”
그러나, 대화가 얼마 오가지도 못했건만 영혼은 다시 입을 꾹 닫아버렸다. 그의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엘사는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고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엘사의 손에서 퍼져 나온 얼음 결정이 허공을 날아서 바닥에 떨어졌다.
다시 영혼을 바라보자, 몸을 웅크리고 눈과 귀를 막은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엘사는 한숨을 다시 내쉬었다.
안나, 부디 무사해야 하는데.
그냥 넘기려고 했지만, 저 영혼이 남긴 말이 계속해서 마음에 걸렸다. 엘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시간이 없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안나에게 돌아가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