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Story
2021.03.29 20:55
Arens of Sheffield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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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어, 메그. 나야 안나. 지금 뭐하고 있어?"
안나는 자신의 시각 뒤로 지나가는 나무들을 보며 말했다. 창밖을 열어 손을 내밀고 싶었지만, 이두나의 만류로 문을 여는 것에만 만족해야 했다. 여전히 욱씬거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잡은 안나는 메가라에게 보고를 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이제 방금 집에 왔어. 나도 좀 쉬어야지. 요 며칠동안 집에 못가서 어머니가 많이 심심해 하시더라. 뭐.. 이웃에서 이사를 왔나? 그 사람이 말동무도 해주고 그랬다는데... 뭐 이건 네가 알 것 까진 아니고.]
"하기야, 너한텐 필립스가 있으니까."
[또 또 딴소리 한다. 난 그사람한테 관심없어. 비즈니스에 사랑을 끼얹지 마. 이쪽 업계 좁잖아. 그래서, 용건이 뭐야?]
"나 죽나 봐."
[뭐?]
안나는 차량의 대시보드에서 꺼낸 초록 포장된 초콜릿 두 개 중 하나를 까 입에 넣었다. 상한 것이었을까. 초콜릿의 맛은 본연의 것보다 신 부분이 더 컸다.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하지. 벨 씨가 곧 얘기할 거긴 한데, 나 손에서 나뭇가지가 자랐다?"
[나무..뭐? 장난치지 말고. 캠프파이어 했다고 자랑하는 거야?]
"아니, 거짓말 아냐. 지금 샘플을 가지고 런던으로 돌아가고 있어. 내일 쯤엔 도착할 것 같아. 벨 씨 말로는 무슨 오메가 프로젝트 부작용에 대해 말하고 엘사 언니를 통해 백신을 만들 수 있다 던데? 근데 그 전에 내가 죽을 지도 모르겠네."
[오메가...]
"짚이는 거라도 있어?"
안나가 스피커 모드를 켜놓으며 통화를 계속했다. 이두나에게도 필요할 정보일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정보통이 오메가 프로젝트 보고서를 아톤의 서버에서 추출했거든. 84년도에 중단된 게 오메가였고, 그걸 이끄는게 아파...아ㅡ 아무것도 아냐."
"그럼 주선지를 알려줘. MI6로 가야할까 아니면 CIA쪽 의료병동으로 가야할까?"
[당연히 넌 여전히 우리 자산이야. 우리 쪽으로 와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혹시 너희 어머니께서 듣고 계신 거 아니지? 왜이리 조용해 ?]
이두나는 메가라의 질문에 쿡쿡 웃었다. 안나는 메가라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약점 잡힌 게 있어서 그런 건가 싶었지만, 현재의 그녀로썬 알 턱이 없었다.
[아... 듣고 계시나 보군요. 그럼 짧고 간결하게 말씀드릴게요. 좌표를 보내드릴 테니 그쪽으로 가셔서 암호명 '블랙퀸'을 입력하세요. 안전가옥이지만 의료진들도 있으니 일단 그곳에서 입원을 해야 할 것 같네요.]
"짐 좀 챙겨도 돼? 장기간 입원할 수도 있잖아."
아이들의 혈청에 부작용이 뒤늦게 발견된 지금, 서버에 저장된 엘사의 항체와 안나와 이두나의 체내에 잠식된 유전자가 맞기까지 시간이 걸릴 수도 있었다. 그리고 출장으로 가족들을 속이는 만큼, 병실을 일종의 사무실 비슷하게 만드는 작업도 해야 했다. 이것은 의료동 요원들이 쉽게 협조해 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 야. 그런 일이 있으면 진작 얘기하지 그랬어.]
"어제부터 아파서 몸살인 줄 알았지. 그리고 너도 좀 쉬어야 할 거 아니니."
안나가 크게 하품을 했다. 지난 새벽에 있었던 간이 수술의 후유증으로 잠을 자지 못했던 탓이었다.
"엄만 안 졸려요?"
안나가 넌지시 이두나에게 물었지만, 그녀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난 왜이렇게 졸리지... 새벽에 깨 있어서 그런가. 아...엄마. 저 조금만 잘게요. 이따가 교대해서 운전할 때 깨워주셔야 해요. 꼭이예요!"
"좋은 꿈 꾸렴, 엄마는 졸지 않을 테니까."
이두나가 안나의 손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손목이 따끔거렸지만 안나는 내색하지 않았다.
58.
"어서 와 랩터, 얼마 만이지?"
"2년 만인데 게르다, 아직도 서장 직인가? 더 오를 수도 있잖아?"
랩터는 오큰의 프로필을 보는 즉시 티라니의 한 뚱뚱하고 넉살 좋은 인상을 가진 경찰서장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에게 좋은 테마주가 있다는 정보로 꼬드껴 그가 앉아있는 카페로 호출시켰다. 테마주가 적힌 종이 냅킨을 에르터 서장에게 넘기면서, 랩터는 휴대폰에 오큰의 프로필을 게르다에게 보여주었다.
"사람을 찾고 있어."
"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지. 하지만 어디 있는지 알아내려면 시간이 걸려. 그리고, 예전같이 총질은 금물이야. 얼마 전 서부의 한 창고에서 AR-15 수천 정과 샘텍스( RDX 및 PETN가 포함 된 범용 가소성 폭발약이다.[1] 상업용 발파, 철거 및 특정 군사 용도에 사용된다.)2톤이 발견되었어. 세미예르 짓이더군. 근데 이건 내 개인적인 생각인데 말이지."
게르다가 냅킨을 주머니에 소중히 넣으면서, 랩터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항상 네가 찾아올 때마다 뭔가 좋지 않은 일, 혹은 구린내가 나는 일들이 벌어진단 말이야. 2년 전에 있었던 연쇄살인사건 때도 네가 나를 방문했었던 시기에 발생했지."
"그래서 서장님, 나에게 수갑을 채워 보시겠다?"
그러자 게르다가 깔깔거리며 랩터의 등짝을 후려쳤다. 단순히 농담으로 받아들인 제스처였지만, 방탄조끼를 안에 입고 있음에도 랩터에게 전해지는 충격은 상당했다.
"당연히 농담이지. 자네가 무슨 피도 눈물도 없는 청부업자도 아닌데."
랩터는 그 말을 듣고 마음이 바늘로 찔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어떻게 보면 그는 청부업자도 겸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 한번 찾아봄세. 세미예르도 같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어. NFF가 우리나라로 장소를 옮겨 활동하긴 하지만, 워낙 은밀해서 말이지. 하지만 이 놈 덩치라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거니 걱정하지 말아."
"그럼, 주식 열심히 하십쇼. 저번처럼 몽땅 날려서 나한테 돈 꿀 생각하지 말고."
넌지시 게르다의 도박 증상을 걱정하며 랩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일어나자, 곧 웨이터 한 명이 커피와 샌드위치가 놓인 쟁반을 그들의 테이블에 올려 놓았다.
"점심 때니까 먹고 들어가시고. 전 이 근방 호텔에 머무르고 있을 테니 언제든지 연락 주쇼. 뭐... 골칫거리 처리하고 싶어도 부르시고."
랩터가 무심하게 말하며 자리를 떴다. 게르다는 그에게 몸조심하고 있으라고 말하려 했지만, 그는 어느새 유령처럼 인파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59.
"심심해애..."
침대에서 대자로 뻗어 누워있는 멜리사가 옆 침대에 엎드려 누워 엘사의 태블릿을 보고 있는 엘리사에게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엘리사, 뭐 봐?"
"응, 동물 보고 있어."
"아, 아! 그러고 보니 그거 언니한테 물어볼 걸 그랬다... 무슨 종 키울지 말이야."
안나는 강아지와 고양이를 두고 싸우는 두 꼬맹이들에게 둘 다 키워도 좋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문제는 종이었다. 엘리사는 강아지를 보고 있었는데, 모두들 하나같이 귀여워 고민이었다.
"음... 고양이도 막 다 귀엽던데... 뭐가 제일 귀여울까."
"가장 좋은 종은, 엘사 언니가 가장 힘들이지 않아도 되는 종들인 거지. 자, 주문하신 코코아 나왔습니다. 꼬마 공주님들."
한나가 침대에 엎드린 두 자매에게 각각 코코아가 든 머그잔을 내 주었다. 일어나 머그잔을 받은 아이들은 이번엔 얼음과 눈을 쓰지 않고 호 호 불며 코코아를 식혔다.
"이번에는 능력을 안 쓰는구나? 흐음..."
한나는 그 모습을 의아하게 여겼다. 평소라면 얼른 식혀 마시고 놀기 위해 달달한 눈과 얼음으로 음식을 식혔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미리 연습하는 거야. 강아지하고 고양이가 보면 펄쩍 놀라서, 다른 동물들한테 일러바칠 수도 있어요. 그리고..."
"걔네들 주인에게 일러바치면, 우리 존재가 드러나는 거잖아!"
들뜸과 두려움 사이의 이질적인 감정이 두 자매의 표정에 섞여 띄워졌다. 한나는 아이들보다 적어도 7년은 어린 신생아의 나이였지만, 정신은 성인에 가까웠고, 그런 귀여운 상상을 할 수 있는 아이들이 내심 부러워졌다. 한나의 유년기는 그리 밝지 못했다. 안나의 유전자로 인해 태어났으며, 태어나자마자 한 일은 돼지를 죽여 윤리관을 무너뜨리고 인형을 부수는 날을 보냈다. 그들이 삽입시킨 엘리사에 대한 무한한 사랑, 그리고 안나에 대한 무한한 증오가 아직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따금 등이 간지러운 정도만큼 증오심은 줄어들었고, 그 자리를 사랑이 대신 채워져 있었다.
"그럴 일은 없고, 너희들 유치원 갈 때나 조심하면 돼."
"킨더 초콜릿 정원?"
"아니, 너희같이 어린..애들이 처음 교육을 받는 곳을 말해."
물론 난 인큐베이터 안에 있어야 할 나이지만, 한나는 속으로 되뇌이며 말했다.
"아! 나 유치원 뭐하는 덴지 알아! 맨날 놀고 먹고 어쩌다 장난감 가지고 공부하는 데 아니야?"
멜리사가 자신있게 가슴을 피며 말했다. 순간 코코아가 흘러내리려 할 뻔한 것을 한나의 바람이 막아주었다.
"멜리산 그런 것 까지 다 아는거야?"
엘리사가 약간 존경한다는 눈빛을 멜리사에게 보냈고, 한나는 어설프게 웃으면서 멜리사에게 박수를 쳐 주었다. 그 박수 소리가 큰 탓인지, 밖에서 그림을 그리던 엘사가 침실 쪽 창문을 통통 두드렸다.
"무슨 얘기 하고 있니?"
안나와 이두나가 부재중인 지금, 그들에겐 새로운 이야깃거리와 대화상대가 필요했다. 벨과 제인은 업무적인 얘기를 서로 나누느라 아렌가의 사람들과 쉽게 얘기를 꺼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엘사는 이야기를 잇고 시간을 죽일 최고의 여자였다.
"동물 얘기하다가... 유치원 얘기요!"
엘리사가 발랄하게 엘사에게 말했다.
"그렇게 가고 싶어?"
엘사가 엘리사의 볼을 간질이며 물었다. 엘리사가 까르르 웃었다. 네! 엘리사는 힘차게 대답했다. 사실, 엘리사는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연구소에서 나왔을 때, 일상에서 비일상으로 전환되는 그 순간, 안나를 처음 만났던 그 순간에도 엘리사는 살 조각과 피 웅덩이에서 자신의 능력을 보며 스스로를 두려워했다. 하물며 주변 사람이 아닌, 자신과 비슷한 또래 아이들과 같이 지냈을 때, 엘리사는 자신이 또래 아이들처럼 행동할 수 있을지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면서도, 이젠 정말 '개체'가 아닌 아렌의 성을 가진 안나 언니의 가족으로써 살아갈 수 있다는 또 다른 관문을 통과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기도 했다. 묘한 흥분에 몸을 부르르 떨자, 엘사는 손을 뻗어 엘리사의 등에서 흘러내린 담요를 다시 덮어 씌워 주었다.
"유치원 가면, 내가 거기 짱 먹을 거야!"
멜리사가 짖궃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엘리사 괴롭히는 애들 있으면 모두 패버릴 거야!"
"패버린다니, 멜리사?"
한나가 멜리사의 말을 지적하는걸 본 엘사는 한나 또한 잘 커주고 있음에 감사했다. 한나를 처음 눈으로 볼 수 있었던 작년의 크리스마스 때, 안나와 머리색과 성격만 다를 뿐 모든 게 판박이인 그녀를 보며 이질스러움을 느꼈지만, 지금은 엘리사와 멜리사의 든든한 '애기 언니'였다.
"그럼...혼내줄 거야."
"맞아, 바로 그거지."
한나가 잘못을 인정한 멜리사에게 커다란 눈깔사탕을 하나 쥐어주었고, 멜리사는 즐거이 포장을 뜯어 입에 넣는다. 그 때, 벨과 제인이 침실로 들어왔다. 밖에서 얘기를 나눴던 탓일까? 그들의 몸에선 냉기가 퍼져있었고, 코끝이 빨개져 있었다.
"무슨 얘기를 즐겁게 하고 있어요?"
엘사가 창문에서 모습을 감췄다. 잠시 뒤, 그녀도 패딩을 벗은 스웨터 차림으로 침실로 들어왔다. 좁던 침실은 순식간에 화목해졌다.
"동물 얘기랑, 유치원 얘기요!"
"유치원? 멜리사, 넌 아마 초등학교부터 다녀야 하지 않을까?"
"싫어싫어, 싫어. 나도 유치원부터 다니고 싶어."
넌지시 묻는 제인의 말에 멜리사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또, 뭘 키울 거니? 이건 아주머니 의견인데, 두 동물을 키우는 건 엘사 씨에게 부담이 될 것 같아. 예전에 리트리버 두 마리를 키운 적이 있는데, 말을 잘 들었기에 망정이지. 털이며 사료며 청소며... 마치 애 둘을 더 키우는 것 같았지."
"고양이는? 고양이는요오?"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묻는 엘리사에게 이번엔 제인이 말을 했다.
"그건 내가 얘기해 줄 수 있어. 아주 작고 귀여운 악마라고 생각하면 돼. 행동하는 모습은 귀여운데... 가끔은 귀찮은 일을 벌이기도 했어."
"고양이는 지금 어디에 있어요?"
"아, 엔딩이 나빴던 건 아냐. 부모님이 적적하셔 하시길래 부모님 집으로 보냈는데, 나 말고 두 분을 더 잘 따르시고, 살도 엄청 올라버렸지 뭐야. 돼지처럼."
"결국 내가 제일 힘들 수밖에 없겠네..."
엘사가 멋쩍이 웃으며 말했다. 원래는 안나와 같이 키우려고 계획했지만, 아이들은 곧 유치원에 가야 할 수속을 밟아야 했고, 안나는 이두나와 같이 행선지를 알지 못하는 장기 출장을 가야 했다. 크리스마스 이전까지도 안나와 이두나, 그리고 때때로 한나는 비밀스러운 출장을 가곤 했기에, 그때마다 엘사는 오로라를 셰필드에 초대해 밤을 보낸다거나, 게임이라는 것도 처음 하면서 그림을 그리는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이제 엘사는 아이 둘과 동물 둘, 즉 아이 넷 정도를 키우는 싱글맘 비슷한 역할을 맡아야 했다.
"그럼 그렇게 하지말고, 내가 생각해 둔 게 있는데 말이야..."
한나가 모두에게 모이라고 손짓했다. 이내 그들을 통해 둥근 사람의 벽이 만들어졌고, 마치 기합을 넣기 전 전략을 상의하는 축구팀의 모습 같았다.
"강아지와 고양이를 합친 동물이 있는데...여우 어때?"
""여우?""
동시에 아이들이 한나의 제안을 입에서 내뱉었다.
60.
안나의 단잠을 깨운 건 또다시 손바닥에 찾아온 통증, 그리고 요란스레 울리는 휴대폰의 전화였다. 마치 베트남전 시절의 PTSD를 떠올리듯 소스라치게 놀라며 일어난 안나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아직은 포근한 상태임에 안도를 느끼며 옆에서 운전 중인 이두나를 흘끗 쳐다 보았다.
"화이트 씨에게서 전화가 왔네요."
"출판사 사장님 말하는 거니? 양장본이 다 완성되었나 보구나."
이두나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안나도 그렇게 생각하며 수신 표시 스크린을 밀었다.
"네, 사장님?"
[안나 씨! 책은 잘 읽었어. 유진이 편집도 적절히 해서 마치 한 편의 대 서사시를 보는 것 같았다니까?]
안나의 전속 편집자인 유진이 언급되자, 라푼젤의 모습이 덩달아 그려졌다. 런던에 돌아가면 그녀를 위해 오로라의 카페에서 케이크라도 하나 사 둬야겠다고 안나는 생각했다.
[그런데 분량이 너무 많은 게 문제야. 내가 본 초고만 해도 1,200페이지인 데다가, 책으로 펴내니까 1,800페이지나 되더라구. 아마 적어도 상, 중, 하 이렇게 챕터별로 나눠야 할 것 같은데. 혹시 시간 된다면 같이 카페에서 얘기해 볼까?]
[음...사장님 시간이 되실까요? 제가 지금 독감에 걸려서 당분간은 바깥외출을 못하는데...]
안나는 자신의 몸에서 나뭇가지가 자란다는 사실을 구태여 언급하지 않았다. 비밀사항이어도 화이트 사장은 안나의 말을 듣고 '새로운 판타지 소설'을 구상하고 있다고 생각할, 나이에 맞지 않게 천진난만한 여자였다. 안나는 한나가 화이트의 우유부단함을 절반 정도만 닮았으면 좋겠다고 마음 속으로 빌었다.
[그래? 괜찮아! 화상통화로도 충분히 가능하니까, 근데 이거. 엔딩에 여지를 남겨 놨는데 혹시 후속작이라든가 있는 거야?]
화이트는 마치 안나의 가려운 부분을 간질이는 것처럼 질문을 쏟아낸다. 안나는 그렇게 열정적인 사장이 좋았지마는, 한편으로 너무 피곤하고 지치게 만들었다.
"네에... 아직 구상중에 있는데, 일단 출판 부수부터 얘기하는 게 어떨까요? 오히려 안 팔릴 수도 있잖아요."
[그래, 그래! 아직 방심하면 안 돼지. 그럼 시간 되면 다 시 전화 줘요!]
살가운 목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어진 것을 확인한 안나는 헤드레스트에 머리를 폭 기대었다.
"화이트 씨니?"
"네, 이번에 내는 책의 한정판의 제작이 곧 완성된다고 하더라고요. 아직 세상에 내놓지도 않았는데, 너무 앞서 나가지 않나 싶어요."
안나는 여전히 바뀌지 않은 바깥의 무미건조한 고속도로의 풍경을 응시했다.
"뭐, 우리의 이야기가 보통 이야기가 아니긴 했죠. 팩트라기엔 너무 픽션같고, 픽션같기엔 너무 팩트같은..."
""팩션.""
두 사람은 서로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한 단어를 동시에 말했다. 블루라운드의 기숙사에서 처음 하룻밤을 보낸 뒤에 받은 첫번째이자 마지막 의뢰에서 이두나가 꺼냈던 말이었다. 팩션, 팩트와 픽션을 섞은 농담이었지만, 그들은 언제 끝날지 모를 팩션의 끝을 내달리고 있었다.
61.
"이걸 보내야 해 말아야 해..."
에리얼은 고민하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막 NFF의 수장이었던 오큰의 신상을 자신의 정보팀을 이용해 프로필을 완성시켰고, 랩터에게 추적을 허가한다는 의미로 프로필을 보낸 뒤였다. 하지만 뒤이어 들어온 CIA 속 정보통이 보내온 내용은 충격 그 자체였다. 내전에 소년병이 필요한 것은 필요충분조건에 해당했다. NFF도 그런 비윤리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조직이었고, 지금도 알바니아로 거처를 옮겼을지라도 중동의 내전엔 NFF의 영향이 아직까진 무시할 수 없었다. 바로 NFF가 소년벙을 모으기 위해 인신매매를 했다는 것이었다. 에리얼은 자신에게 주어진 우연의 결과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녀가 할 수 있다면, 영원히 묻을 수 있는 비밀이 드러났다. 하지만, 안나를 알기에 언젠가는 드러내야 할 사실이기도 했다. 담뱃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피우고 있는 에리얼의 앞 책상에는 이젠 세상에 없는 그녀의 아버지가 남긴 녹음된 CD와 오큰의 프로필 용지가 놓여 있었다. 에리얼은 다시 한 번 CD의 내용을 듣기로 했다. 그저 그녀가 착각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지난 72시간 동안 잠을 자지 않아 환청을 들은 것일 수도 있었다. 디스크에 CD를 넣은 그녀는 이내 컴퓨터에 뜬 CD의 이름을 재확인했다.
컴퓨터에 뜬 CD의 이름에는 12년 전의 날짜가 적혀 있었다.
안나와 엘사 자매가 실종된 때와 같은 년도였다.
62.
12년 전.
"확실히 저 아이들이 아렌의 성을 따르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오큰은 눈 앞에 앉아 있는 두 사람에게 갓 따라낸 차를 권했다. 왼쪽의 말쑥하지만 조금 긴 구레나룻이 외모에 걸림돌인 젊은, 이제 막 20대에 접어든 듯한 회색 정장의 사내는 거절하지 않고 찻잔에 손을 가져갔다. 그의 자세는 다리를 꼰 채로 오큰을 비아냥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반면 오른쪽의 사내는 그의 차를 마시지 않았다. 양손에 깍지를 껴 가지런히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사내는 왼쪽과는 다르게 나이가 들어보였고, 모래밭에 어울리지 않는 흰색정장을 입고 있었다.
"우리가 보낸 DNA 분석 보고서에도 99.97%의 유전자 일치율을 보였고, 오메가 프로젝트에서도 80%에 달하는 적응성을 보여주는 유전자를 가졌습니다. 지금껏 보지 못한 경이로운 확률을 가진 아이입니다. 하얀 아이 말이죠. 그 아이 이름이 뭐였죠?"
"엘사, 엘사 아렌입니다. 이름을 묻다니 특이하시군요. 한스 웨스터가드 씨. 당신이 브론코 씨와 다른 형제들을 대신해 이곳에 들른지 1년, 거즘 매 달 한 번 꼴로 오시곤 했지만, 아이들의 이름을 직접 거론한 건 처음입니다."
오큰의 지적은 정확했다. 오른쪽의 사내는 두 달에 한 번 꼴로 오큰이 이끄는 NFF에 연고가 없는 고아들을 공급했으며, 왼쪽의 한스는 그런 아이들을 통해 '궁금하지 않는' 실험쥐로 쓰이게 했다.
"마음에 들어서 말입니다. 아, 소아성애가 아니니 안심하세요."
오른쪽의 사내의 오른 이마에 나있는 흉터가 잠시 꿈틀댔다. 뭐가 되었든 불쾌한 건 불쾌한 것이고, 변하는 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저희 프로젝트에 가장 적합한 아이이고... 그 아이가 크면 아주 아름다운 보석이 될 것 같더군요. 어디까지나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입니다."
오큰은 처음 그를 만났을 때, 숭계서열에 밀렸음에도 대기업 총수의 아들임을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희망하는 직업은 다소 소박했다. 글을 쓰는 작가. 그래서 그의 말에는 약간의 비유가 종종 섞여있곤 했다.
"그 아이를 제가 사겠습니다."
한스가 말했다. 오큰은 어느 순간 자신의 단체가 무장단체로 위장한 인신매매단이란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그에게도 나름의 선이 있었지만, 전쟁은 무기를 다루는 사람을 필요로 했다. 먹을 곳과 잘 곳을 찾던 아이들은 자연스레 NFF에 모여 훈련을 하며 병사가 되었고, 아렌가의 아이 중 한명도 다른 이들의 정도를 따라가고 있었다.
"자매를 구매한다는 얘긴가?"
침묵을 지키던 하얀 정장이 입을 열었다. 걸걸하면서 무미건조한 그의 말에선 감정을 찾기 힘들었다. 저명한 프로파일러들을 데려와도 그의 어조에서 감정을 특정하기 힘들 터였다.
"아뇨, 하얀 아이 말입니다. 유전자 인자가 저희에게 맞다고 하니, 데려가야죠. 그뿐입니다. 동생 되는 아이는 저희 실험에 적합하지 않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어요. 연구원이 말하더군요. 그 아이에게 능력을 주입한다면 얼마 간은 효과가 있을 테지만, 서서히 몸이 죽어갈 것이라고."
"그래도 자매인데 떼 놓을 수는..."
"적당한 수가 있어. 위장을 하는 거지."
하얀 정장의 사내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하얀 아이, 엘사가 죽었다고 가장하세. 그럼 안나란 아이도 절로 수긍할 걸세. 부엌에 아이들의 시체를 두고 백린으로 태워버리도록 하게."
섬뜩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그를 보며, 옆에 있던 웨스터가드 사내는 이죽대는 웃음을 지었다. 자신만큼 미쳐 있는 사람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좋은 생각입니다. 안나는 실험체보다 소년병 쪽에 더 적합한 것 같더군요. 5년만 지나면 NFF 최고의 암살자가 될 수 있을 정도로 훈련에 빠르게 적응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지갑을 더 열고 싶어지는군요. 그럼 안나도..."
"그만 두게."
추가로 돈을 지불하기 위해, 당시의 제인이 아닌 다른 비서가 또 다른 현금 가방을 들고 나타난 순간, 하얀 정장의 사내가 그를 말렸다. 분노? 아니면 혐오가 깃든 말인 것 같았다.
"계약에 위반되지 않는가?"
"아, 계약. 계약... 그랬죠. 한 아이만 구입하기로 했었죠. 알겠습니다. 당신이 가진 개인적 권한 때문에 저희 회사의 잠재적 손실 수십, 수백억이 날라갔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깟 손실은 지금 미국으로 밀수된 우리 마약으로 메꿔졌으니 걱정 말게. 난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 보겠네."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오큰과 웨스터가드도 덩달아 일어나 그와 악수를 했다. 한스와 사내가 나가자, 화면에는 다시 의자에 앉아 한숨을 쉬는 오큰만이 남아 있었다. 아니, 남은 것이라 생각했다.
"...잘 찍고 계십니까? 셰이 카리스."
"네, 잘 찍었습니다. 이제 저에 대한 계약금도 주셔야 겠습니다."
찰칵 거리며 캠코더에서 usb를 분리해 오큰에게 건내졌고, 동시에 카메라가 인위적으로 흔들렸다.
"모자이크는 꼭 해주셔야 합니다. 나는 이미 얼굴이 팔렸고, 한스 웨스터가드는 지금 페이스 마스크를 쓰고 있어요. CIA같은 정보기관에서 3D프린터로 뽑아 쓰는 것 말입니다. 그럼 모자이크 대상은 누군지...잘 알겠지요?"
"네, 당연합니다. 파울 세르난데즈 씨만 모자이크 하면 되잖습니까."
익숙한 목소리가 에리얼의 귀에 스며들었다. 에리얼은 이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아빠."
적대하던 갱단의 히트맨에게 죽음을 당했던 그의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나오지 않았고, 카메라는 부자연스럽게 흔들렸다. 흔들리는 카메라처럼, 에리얼의 마음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오늘 이 영상은 자네가 가지고 있게. 후에 저 둘이 우릴 배신할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야. 우리 둘은... 애초에 한 배를 탄 사이고, 저들은 우리의 배에 막 합류한 상태지. 안 그런가?"
"그 말도 맞습니다. 아무튼, 잘 보관해 두겠습니다. 아마 우리의 이번 생에 이 CD를 찾는 일은 없을 테지만 말입니다."
에리얼은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다행스럽게도 랩터가 이곳에 없었기에 망정이지, 만일 그가 있었다면 CD의 존재를 심각하게 받아들일 것이 분명했고, 처분하라고 말할 것이었다. 알바니아에서의 CIA의 의뢰를 수락시켜 그가 여기에 올 일은 없지만, 안나 자매가 NFF에 납치되었을 수도 있을 가능성이 아주 농후한 상태였다. 그렇게 된다면, 안나는 NFF에게 속은 게 되었다.
그들 뿐만이 아니었다. 만에 하나 작은 가능성이지만, 지금도 이어지는 중동 전쟁은 사상을 넘어선 경제의 영역에서 조작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에리얼은 한스 웨스터가드와 자신의 아버지인 셰이 카리스는 리스트에서 배제시켰다. 이미 두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성을 잃은 사람이었다. 무덤을 파헤쳐서 붙잡을 멱살도 그들에겐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두 사람, 정확히는 한 사람이었다. 파울 세르난데즈.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누구이길래 오큰은 아버지에게 모자이크를 부탁했던 것일까?
'어떻게 하지?'
에리얼은 고심했다. 운명이란 암살자가 바로 그녀의 후두부에 총구를 들이미는 느낌이었다. 처분을 해서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살아갈까, 아니면 모든 진실을 얘기해야 할까. 둘 다 마음은 편치 않는 선택이었다. 그러다 문득, 에리얼은 그 결정을 잠시 유예하기로 했다. 파울 세르난데즈. 그 사람이 누구인지 부터 조사하고 나서 결정하는 것도 늦지 않았다. CD에 나와있는 영상의 화질은 영 좋지 못했다. 기껏해야 144p정도의, 최소한의 영상 증거라고 내세울 만한 화질이었다. 그래도 에리얼은 좋은 세상 속에 살고 있었다. 빅데이터를 이용한 영상분석으로 화질을 억지로라도 높일 수 있으니까. 에리얼은 곧바로 휴대폰을 들어 자신이 잘 아는 인도인 영상분석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63.
6시간 뒤, 이두나는 조수석에, 안나는 운전석에 앉아 차를 몰고 있었다.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으며 한쪽에 세워진 가판대에서 싸구려 초콜릿을 한 움큼 산 안나는 미리 까 놓은 손톱만한 초콜릿들을 운전대 위에 올려놓으며, 소문으로 와전된 조타륜과 도너츠의 일화를 흉내내고 있었다. 때마침 일직선 도로가 나타나 안나는 아픔 속에서도 동화 속을 거니는 느낌을 받았다. 이두나는 6시간의 운전에 지쳐 잠에 들어 있었다. 아렌가의 특유의 웅크린 자세로 잠을 자고 있는 이두나를 보면서, 안나는 엘사와 엘리사, 멜리사는 이두나의 잠버릇을 닮았고, 자신과 한나는 아그나르를 닮았을 거라 생각했다. 두 사람의 잠버릇은 이불을 모두 차고 자는 버릇이 있었기에, 그들이 찬 이불을 나머지 아렌들이 돌돌 말아 웅크리며 경단처럼 자는 일이 지난 1년 사이에 빈번하게 벌어지곤 했다.
라디오에선 take me home, country roads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치 그들이 집에 가는 것을 맞추기라도 하는 듯 기묘한 우연이었다. 또한 안나가 전쟁터에서 살아남았을 때, 흑색 작전을 수행하고 난 이후에 들었던 곡이기도 했다. 문득 뮬란이 안나의 기억 속에 아른거렸다. 1년 전 친구의 죽음은 안나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으며, 안나에게 가족을 돌려 주었고, 새로운 가족을 맞이하게 해 주었다. 안나는 생각했다. 만약 그 때 뮬란이 살았더라면, 자신의 운명 또한 바뀌었을까? 안나 브라이트는 그저 언젠가의 미팅에서 비즈니스 관계로 이두나 아렌을 만나게 되었을 것이었다. '그리고 이 이상한 병에 걸리지 않아도 됬었겠지.'
한편으론 철심을 박은 듯 이질스러운 팔의 안쪽 감각을 느끼며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아이들을 탓한 게 아니었다. 아이들의 도화지는 안나를 포함한 아렌들의 색깔로 조금씩 채워지고 있었고, 일말의 부정적인 색깔은 전혀 없었다. 그때였다. 안나의 바짓주머니에서 시작된 진동이 안나의 사색을 끊었다. 안나는 갓길에 차를 세운 다음, 차에서 내려 바깥 공기를 마시며 전화를 받았다. 발신인은 한나였다.
[잘 가고 있어?]
한나는 조금 걱정하는 목소리로 안나에게 말했다. 벨이 한나에게 털어놓기라도 한 것일까 싶어 노심초사한 안나였다. 한나의 바람과 엘사의 물은 인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오메가 보고서를 추가로 찾아 읽은 벨이 떠나기 전에 귀띔해 주었다. 괜스레 다른 가족들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특히 다시 만나고 새로이 만난 가족이라면 더더욱.
"어, 중간에 엄마랑 한번 교대하고 지금은 내가 운전대를 잡고 있지. 지금 엄만 주무시고 계셔."
[몸을 잔뜩 웅크린 채로 말이지?]
"그야 뭐, 안 봐도 비디오지. 아욱!"
안나가 당연한 듯 너스레를 떨며 답했다. 약간의 웃음이 피식 나오자, 손목이 찌를 듯이 아파왔다.
[무슨 일이야, 괜찮아?]
수화기 너머, 한나의 주변에서도 언니? 언니야? 라며 외치는 멜리사와 엘리사의 목소리도 새어 들렸다.
"잠깐 걷다 돌부리에 넘어질 뻔 했지 뭐야. 주위에 애들도 있는 것 같은데, 한 번 바꿔줘. 벌써부터 보고 싶어 죽을 것 같네."
[주책은... 얘들아, 언니 전화야.]
잠시 덜걱거리는 소리다 들리면서 둘이서 가위바위보를 하는 건지, 기뻐하는 멜리사와 아쉬워하는 엘리사의 소리가 들렸다.
[언니! 우리 안 보고 싶어?]
"그야 보고 싶지. 지금 당장 핸들을 꺾고 돌아가고 싶은데... 어쩌겠어. 일이 바쁜 걸."
사소한 말에도 거짓을 희석시키고 반복하는 건 아주 간단한 심리전의 일환이었다. 아이들과 아렌들은 이제 안나에 데한 의심을 거의 지울 것이 분명했다. 사실 처음, 그들은 안나와 이두나의 장기 출장을 믿지 않았다. 안나는 그들 앞에서 휴대폰을 꺼내든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행자인 벨의 역할이 그들을 캠프에서 분리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언니언니언니, 근데 말야. 우리 동물 언제 키울 거야?]
"동물?"
안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캠프 출발 직전 아이들이 나눈 이야기를 상기시켰다. 안나는 그 당시에 강아지건 고양이건 둘 다 키워도 된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벌써부터 아이들이 견종과 묘종을 선택한 건가 싶어 안나는 왠지 모를 기특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응, 엘리사와 다른 언니들과 아주 심도 깊은 얘기를 나누었는데 말이야...]
멜리사가 사뭇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안나는 혹시 호랑이라도 진지하게 키우려는 것인가 싶어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도로에서 그런 그녀를 볼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안나는 호랑이 키우는 건 부정하고 싶었다.
[두구두구두구두구....]
엘리사가 내는 어설프지만 귀여운 북 두드리는 여린 효과음이 들렸다. 세상 모든 북이 저런 소리가 난다면 어떨까 하고 안나는 잠시 행복한 상상을 했다.
"여우 키우자! 여우우우!"
멜리사가 늑대를 흉내내듯 하울링을 했다. 멜리사 주변으로 잦은 웃음이 들렸다. 안나는 두 가지 의미로 당황스러움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 아이들이 이상한 동물은 얘기하지 않았던 것, 두 번째, 강아지도, 고양이도 아닌 동물이었던 것이었다.
"여우 어때? 귀엽잖아! 강아지 같고, 고양이 같고...안아주고 싶어!"
멜리사는 벌써부터 여우가 자신의 품에 있는 듯이 아양을 떨며 안나에게 말했다.
"음, 엘사 언니 좀 바꿔 줄래?"
"못 키우는 거야? 으음..."
조금 풀이 꺾인 멜리사를 뒤로 하고, 달그락 소리와 함께 엘사가 "여보세요"라고 대화의 또 다른 장을 열었따.
"언니, 감당할 수 있겠어?"
여우는 런던의 길고양이라고 할 만큼 많이 존재했기에, 그들이 얼마나 짖궃고 지나치게 활발한지 알고 있었다. 벌써부터 안나의 머릿 속 캔버스에는 온 집안을 휘돌아다니는 여우와 그 꼬리라도 잡아보려고 허둥대는 소심한 엘사의 모습이 그려졌다.
"음, 위키피디아에서 잘 살펴보면 되지 않을까...?"
엘사는 약간 불안에 떤 목소리로 말했다. 여우가 무서운 것이 아닌, 여우의 습성 그 자체가 엘사의 체력에 맞을 수 있을까가 관건이었다.
"일단 엘리사와 멜리사가 아직 유치원 보낼 시기는 아니니까... 그때까지 천천히 케어하면 되지 않을까 싶어."
"그럼 새끼여우를 분양해야 할 텐데... 성체는 길들이기 쉽지 않을 거 같거든. 강아지라면 몰라도 이런 면에서 여우에겐 고양이같은 버릇이 좀 있어."
"생각보다 잘 아는구나?"
뜻밖의 칭찬에, 안나는 살풋이 웃었다.
"예전에 내 머리칼 색깔보고 사람들이 여우라고 종종 불렀거든. 누가 먼저 불렀더라. 메가라가 시초였지...암..."
"그 사실을 들으니 또 의외인걸. 얼음장같이 차가울 것 같은 그 여자가 붙였다니..."
"잠깐 이야기가 딴 데로 새는 것 같네. 음... 그래, 키우자. 털 알레르기는 다들 없잖아? 비염 있는 사람도 없고. 대신 엘리사와 멜리사가 잘 돌봐 주어야 해. 반려동물이 사회성 기르는 데에 도움을 준다는 걸 들어 봤거든. 기르면서 책임감도 키우고..귀엽고..그렇잖아."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진 안나가 말을 잠시 끊었다.
"그건 그렇고, 밥은 어떻게 할 거야? 설마 굼고 있는 건 아니지?"
아렌 가에서 요리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안나가 유일했고, 그 다음으로 한나가 레시피대로 겨우 따라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이두나는 차를 끓일 줄 알았고, 벨과 제인은 요리 자체를 안하는 사람이었다. 아이들은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요리의 요자도 접해보지 못한 아이들이었다.
[그게 문제야... 혹시 레시피 보내줄 수 있니? 이러다 쫄쫄 굶게 생겼어...]
"아까 엄마가 그렇게 말하시더라구... 알았어. 레시피 대로 보내줄 테니까 절대로 이상한 것들 넣으려고 하면 안 된다? 가령 엘리사와 멜리사의 눈과 얼음이라던가."
[그건 왜? 설탕 대용으로 쓸 수 있...]
"잘못하면 싱거워지고 맛을 버릴 수 있어서 그래. 아무튼 절대 쓰지 마. 꼭이야, 꼭!"
안나는 차마 이유를 말할 수 없는 신신당부를 엘사에게 했다. 엘사는 미심쩍어하면서도, 안나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혹시 몰라 설탕 통을 버스에 구비시켜 놓은 게 안나의 큰 한 수였다.
64.
"우리 여우 키운다아!"
멜리사의 환호에 맞춰 엘리사는 덩달아 하이파이브를 했다. 엘사와 한나, 제인과 벨은 빙그르르 손잡고 방방 뛰는 아이들을 보며 각자의 생각이 깃든 복잡미묘한 미소들을 지어냈다.
엘사는 여우를 어떻게 길들여야 하나 싶은,
한나는 앞으로 요리를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제인은 아이들로 인한 병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벨은 벨라를 어떻게 조치해야 할까 고심하는,
미소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