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두각시의 칼 27~28
85.
"공주님도 그렇고, 수호경님도 그렇고... 왜이리 판박이신지."
엘사와 안나, 두 사람은 뒷뜰에서 새벽에 성으로 막 돌아온 게르다에게 가벼운 꾸지람을 들었다.
"죄송합니다아..."
"결례를 보여 미안하구나..."
안나와 엘사는 거의 동시에 게르다에게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안나는 공주를 포함한 왕족의 경호원은 호국경, 혹은 수호경이란 직위를 부여받는다는 사실을 게르다를 통해 알았다. 경호대장보다는 아래였지만, 그래도 왕족의 옆에서 직접 보필을 한다는 식으로 들었기에, 안나는 옆에 있는 소박함이 그득한 공주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공주님, 제 눈 똑바로 보세요. 한눈 돌리지 마시구요."
게르다는 마치 혼을 내려는 어머니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엘사에게 말했다. 안나는 오른쪽 이마에, 엘사는 왼쪽 이마에 상처를 입었다. 그들은 서로 나란히 뒷뜰에 놓여진 물품 중 하나인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엘사는 우물쭈물거리며 고개를 겨우 들었다. 게르다는 울먹이려는 공주를 보며 여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라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공주님, 저는 원래 하루 더 허버트 놈의 수발을 들어야 했어요. 전 공주님이 안나 수호경님하고 잘 지낼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그냥 느낌이 그래서 허버트에게 말하고 왔더니마는...에휴우. 공주님은 그렇다 쳐도, 안나 수호경님은 주의를 더 기울이셔야 하는 거 모르세요? 아니..."
게르다의 설명은 그 후로도 30분 동안이나 이어졌다. 안나는 게르다의 장황한 연설을 30분동안 들으면서, '황실의 경호원', '공주의 보필' '공주의 검술 교사'같은 단어들을 겨우 들었을 뿐이었다. 집중을 못한 이유는 하나였다. 넘어지기 전 높이를 가늠했던 새벽의 여명 속에서 과수원을 하나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안나가 제일 좋아하는 사과를 재배하는 곳이었다. 빛이 채 차오르지 않은 하늘이었음에도 사과의 붉은 빛은 금방이라도 깨물면 투명한 노란 즙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랬다. 두 사람은 아침을 먹지 못하고 서로의 침실에서 끙끙 앓다 화가 난 시종장, 게르다에게 붙잡혀 설교를 듣고 있었다. 배가 고프다는 것을 알려주듯, 안나는 40분을 센 끝에 엘사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는 걸 파악했다. 동시에 자신의 배에서도 꾸르륵, 하고 허기진 소리가 나왔다.
"...어쩜 둘이 똑같으실까. 오늘 설교는 여기까지만 하겠어요. 공주님 스케줄도 있으니까요. 자, 자, 모두 일어서세요!"
안나는 어찌 되었건 한 나라의 공주, 그리고 공주의 경호원을 대하는 게르다를 보면서 마치 게르다가 이 성의 주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권위적인 모습이 아닌, 마치 친숙한 아주머니를 뵈는 듯 했다. 안나는 그런 게르다에게서 벨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른 점이라면, 벨은 늘씬하고 아름다웠으며, 게르다는 뚱뚱하고 넉살이 좋다는 차이점이 있었다. 게르다의 안내에 따라 엘사, 그리고 안나 순으로 대회당을 거쳐 공주의 집무실로 향했다.
'식사를 집무실에서 하는 건가?'
어제는 몰랐지만, 생각보다 추운 성 안의 온도에 두 팔을 모으고 으슬으슬 떨면서 안나는 생각했다. 옷을 좀 더 껴 입을 걸. 하고 생각한 그녀를 본 어느 시녀 한 명이, 그녀에게 담요 하나를 씌워 주었다. 한결 추위가 가신 안나까지 집무실에 도착했고, 그곳에는 긴 타원형의 테이블, 그리고 서신과 업무용으로 보이는 양피지 두루마리들이 여럿 쌓여 있는 집무실의 책상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위에는 다시 만들었는지 감자 스프가 들어있는 접시, 그리고 빵 위에는 눈에 선할 정도로 모락모락 김이 나 있었다. 안나는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생각 이하로 소소한 왕족의 식사에 풀이 확 죽었다. 안나는 양념이 가득 배어진 돼지고기 요리라거나, 프레쳇 장어 젤리로 만든 푸딩이라거나 하는, 그녀 기준으론 사치스러운 음식들이 이곳엔 없었다.
"지금 뭐 하는 거니? 어서 앉으렴."
엘사는 집무 책상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의자에 앉았고, 안나는 그의 반대편에 앉아 음식을 맞이했다. 타원의 끝과 끝 사이는 거리상으로도 멀어 보였지만, 마음 상으로도 가깝지 않아 보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엘사가 먼저 숟가락을 들고 감자 스프를 휘젓기 시작하자, 안나도 그제서야 뻣뻣하게 숟가락을 들었다.
"질문하고 싶은 게 있나 보구나."
빵을 잘게 찢어 스프에 섞어 먹는 게 더 낫다고 판단한 안나에게 엘사가 불현듯 말을 꺼냈다.
"어, 어떻게 아셨어...요?"
"얼굴에 다 쓰여 있는데, 궁금할 법도 하지. 사람들은 남을 저주할 때 내 이름을 들먹이고, 나에 대한 소문을 끔찍한 파생형을 잉태하지. 또 대화의 주제를 벗어나 욕을 할 때도 사람들은 날 언급해. 소문의 주인공이 바로 눈 앞에 있는데, 궁금해 못 배기는 게 당연한 법이지, 나도 너에게 궁금한 게 많단다."
집무실에는 고래기름으로 빛이 들어오는 샹들리에가 방의 천장 한 가운데에 매달려 있었다. 하지만 엘사의 얼굴엔 수심이 드리워졌음을 안나는 알 수 있었다. 엘사는 안나가 무슨 질문을 할지 알고 있었다.
'얼음 마법을 부리신다는 게 사실인가요?'
엘사는 필사적으로 부정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렇게 결심한 찰나의 사이에, 이번에는 잘 끼고 있던 장갑의 끝에 얼음이 맺혀 있었다. 엘사는 곧장 안나의 시선을 향해 흘긋 눈을 돌렸다. 안나는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엘사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원래 식..."
"나가 보거라."
"네?"
"나가라니까!"
안나는 뜻밖의 말에 놀람을 금치 못하면서도, 분노가 어린 엘사의 눈을 잠깐 볼 수 있었다. 안나는 절대적인 고용인의 말을 들어야 했기에, 몇 번 떠먹지 못한 감자 스프와 빵 조각들을 두고 집무실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천천히 문을 닫은 안나는 갑자기 찾아온 냉기에 몸을 다시금 떨었고, 시녀가 준 담요를 망토처럼 몸에 걸치고 있기로 했다. 달리 어디 갈 곳도 없는 안나는, 겨우 허기를 면한 배와 허리춤에 찬 사브르를 차례로 매만지며 복도의 풍경을 다시금 눈에 담았다. 처음 외관으로 보았을 때와 비슷한 감옥, 감옥처럼 복도에 장식이라고 치부되는 것은 겨우 촛불과 카페트 뿐이었고, 나머지는 차가운 회색 돌바닥과 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안나가 책에서 본, 황제가 거취하는 아렌델 궁전 내부를 그린 삽화와는 정반대였다.
궁전의 복도는 담요가 없어도 따뜻할 것 처럼 온통 밝았고, 기둥마다 이름 모를 예술가들이 만든 조각상들이 줄지어 배치되어 있었다. 천장에는 엘사의 것과는 크기부터가 다른 웅장한 샹들리에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안나는 생각했다. 만약 그때 소트니코바를 제압하는 쪽을 택했다면, 이렇게 추위에 떨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안나는 이미 죽어버린 소트니코바에게 묻고 싶었다. 죽을 운명이었던 당신에게서 내 이익을 도모해도 되었겠냐고,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저 차가운 공기만이 안나의 허파 속으로 휘어 들어와 기침을 자아냈을 뿐이었다.
"들어오거라."
문 안쪽에서 사뭇 풀이 죽은 목소리로 엘사가 안나에게 말했다. 안나는 자신이 무슨 결례를 저질렀는지에 대해 문을 열고, 다시 제자리에 앉을 때까지 곰곰히 생각했다. 하지만 안나의 잘못이라고는, 아름다운 외모를 뚫어져라 본 것 밖에 없을 뿐이었다. 생각해보라, 이렇게 출중한 외모를 가졌음에도, 사람들은 그녀의 존재를 마녀처럼 여겼고, 얼굴조차 거의 알려지지 않았을까?
"죄송합니다. 공주님."
안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엘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분명 안나의 행동에서 무례함이 느껴졌을 것이었으리라. 안나는 생각했다. 조금 까다로운 첫 직업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네 잘못이 아니다. 내 잘못이야. 알잖니, 내 성격."
"성....격이요."
성격? 안나는 고개 대신 마음을 살짝 기울였다. 마음의 그릇이 흔들려 그 안을 채우고 있던 호기심이 조금 흘러내렸다. 안나는 그녀가 소심할 뿐이지, 히스테리즘을 가지진 않았다고 생각했다. 엘사는 잠깐 동안 장갑을 낀 자신의 손과 안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안나 입장에선 그녀가 마치 살인을 저지른 아녀자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누군가랑 같이 먹는다는게... 익숙치 않아서 그런가 보구나."
엘사는 열린 덧창으로 보이는 넓게 펼처친 농원, 그리고 그 너머의 시가지를 보며 심호흡을 하였다. 안나는 슬며시 자리에 앉으며, 그녀가 공황에서 돌아오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제 먹자. 지체시켜서 미안해."
"아, 아뇨오. 괜찮습니다..."
안나는 조금 식어버린 스프를 빵에 찍어먹는 행위를 재개했다. 남은 빵으로 접시를 싹싹 닦아 먹을 때까지 안나는 자신의 식사 모습을 빤히 쳐다보며 좋은 말로는 조금씩, 나쁜 말로는 '깨작깨작' 먹는 엘사의 시선을 피하느라 하마터면 체할 뻔 했다. 안나는 그런 엘사를 보며 어릴 적 자신을 떠올렸다. 부모님 중 한 명이 없다는 사실은 린든의 어린아이들에겐 적지 않은 일이었지만, 고아원의 아이들은 그것이 아니었다. 안나의 아버진 생사가 불명이었고, 안나의 어머닌 린든의 거리 한가운데에서 석궁의 화살에 맞아 돌아가셨다.
다섯 살 즈음, 안나가 유독 잠이 오지 않는 날, 동화책을 읽어달라고 매티어스의 팔을 잡아 끌어 방에 데려온 적이 있었다. 그 때 마법의 가면에 대한 동화책을 매티어스는 메가라와 안나에게 읽어주면서, 메가라는 가면사에 대한 꿈을 키웠으며, 안나는 가면을 쓴 공주가 모든 기억을 되찾아 행복하게 살았다는 결말을 듣고는 매티어스에게 처음으로 부모님의 행방을 물어보았다. 그리고 매티어스에게서 순화된 어머니의 죽음, 묘지의 위치, 그리고 이름을 알아들은 안나는, 밤에 찾아온 장대빗 소리에 묻힌 울음을 토해 냈고, 사흘 동안 침대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침대 밖이 무서운 안나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건 메가라와 다른 아이들, 그리고 매티어스였다. 누구보다도 활발했던 안나가 풀이 죽어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소문이 퍼지자, 아이들은 저마다의 사소하지만 중요한 선물들을 가져와 주었다. 룸메이트인 메가라는 사흘 동안 안나의 머릿결을 닮은 아담한 목각인형 하나를 선물했고, 매티어스는 마시멜로를 끼얹어 섞은 핫초코를 선물해 주었다. 안나는 아이들의 선물, 메가라의 목각인형, 그리고 매티어스의 핫초코에서 인류애를 느꼈다. 그리고 혼자가 아님을 체감했으며, 다시금 방 밖으로 걸어 나와 다시금 활발해져 지금의 안나가 되었다.
안나는 엘사를 보며 생각했다.
엘사에게 필요한 것은, 얼어붙은 마음을 녹일 선물이었다.
86.
"...이제 이해가 됬니?"
"...생각보다 많이 검소하시네요."
안나는 식사 직후, 집무실에서 서코노스의 카르나카 지방의 공작의 초청장을 찢어버리고, 영지의 세율을 20% 감면해 달라는 시민 대표의 탄원서에 서명하는 엘사에게서 영지의 비밀을 알았다. 엘사의 영지는 안나에게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화려한 색채가 돋보였다. 식사 직후 쉬는 시간 동안, 안나는 시녀에게 부탁해 망원경을 하나 얻을 수 있었고, 창가를 통해 어렴풋이나마 영지를 둘러볼 수 있었다.
린든, 그리고 커보울과 다르게 쥐 역병이 덜 창궐한 모양이었다. 빛의 장벽과 아크 방사탑은 존재했지만, 커보울과 에버튼 가에 비하면 월등히 적었고, 사람들의 얼굴엔 비굴함이 아닌 행복과 복받침의 감정이 어려 있었다. 역병은 엘사의 영지를 아직 침범하지 않은 모양이었고, 도시에서도 시민 경비대들이 하수도를 순찰하며 쥐들이 드나드는 곳에 쥐약을 자발적으로 설치하는 등의 자경 활동도 이루어지면서, 자연스레 치안이 안정적으로 변했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엘사는 사치를 별로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집무실이 보여주듯, 가구들에서 곡선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겨우 가구라고 부를 만큼의 투박한 의자, 책상, 책장, 찬장들 속에서 그나마 고풍스럽다고 인정되는건 엘사의 봉랍 인장과 찻잔, 그리고 잔을 받히는 접시 뿐이었다.
"저,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보렴."
"왜 사교 클럽에 가시지 않는 거예요? 음... 그러니까... 견제를 위해서?"
안나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상세하게 풀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탓이어서 말을 제대로 끝맺지 못했다. 하지만 엘사는 안나의 말의 의중을 파악한 듯 입꼬리를 살짝 실룩였다.
"내가 가봤자 뭐하겠니. 날 견제할 필요가 없다고 느낄 텐데."
"그래도, 공주님이시잖아요. 아렌델의 왕족이시면, 공주님이 가진 힘은..."
"없어. 끝이야."
엘사가 깃털펜을 잉크통에 찍어 무언가를 적어내며 답했다.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을 거야. 소심하고, 우유부단하고, 겁이 많은 날 누가 좋아하겠어? 소문도 소문이지만, 너무 과하잖니."
"하긴... 공주님에 대한 소문이 너무 과장되긴 했죠."
안나는 분명히 말할 수 있었다. 엘사에 대한 소문은 성격에서 반쯤 맞을지는 몰라도, 얼음 마법을 쓴다거나 하는 미신적인 소문은 거짓이었다. 마법이라고 한다면, 소름끼칠정도로 창백한 아름다움이 깃든 외모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도 공주님의 영지 사람들은 공주님의 정책에 옹호하고 좋아하실 것 같은데요?"
안나는 그럼에도 엘사의 자조에 반박했다. 방금 전에도 세율을 20%를 낮추었으며, 멀리서일지라도 시민들의 눈에는 행복이 들어 있었다. 마음이 죽은 이가 거의 없어보이는, 마치 동화 속의 왕국 같았다.
"여기, 이 서명이 누구 건지 아니?"
엘사가 양피지 하나를 안나에게 내밀었다. 안나는 이런 것까지 봐도 되나 싶어 주저했지만, 결국 양피지를 받아들였다. 서명에는 엘사의 것으로 보이는 봉랍이 찍혀... 있지 않았다.
"다른 봉랍이고... 이건 아마..."
서명란에는 제국의 왕자인 한스의 서명이 쓰여져 있었다. 안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영지의 주인은 엘사고, 영지의 정책은 엘사가 주도하는 게 맞는 것이었다. 하지만, 양피지에는 한스의 서명만이 공란을 채우고 있었다.
"난 꼭두각시야. 이 영지를 좋게 만드는 것도, 내가 하는 게 아니라. 내 오빠인 한스 왕자의 공으로 돌아가고 있어."
"하지만, 그럼 공주님은 그냥..."
"맞아."
엘사는 안나의 다음 말이 무엇인지 알겠다는 듯 그녀의 말을 끊었다.
"난 껍데기만 공주일 뿐이고, 마을 사람들은 이곳의 영주가 한스인 것으로 알고 있어. 다만 외출이 잦아 대중들에게 나서지 못한다는 선언 때문에 내가 여기 있어도 상관없는 일이지."
"그럼 공주님의 영지는 도대체 어디인가요?"
안나는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이해가 가지 않는 눈 앞의 상황을 이해하고자 애썼다. 하룻밤 사이에 그녀는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귀족이라 생각한 사람은 제국의 황족이 가지고 있는 인장을 가진 공주였고, 공주의 영지는 다른 곳보다 평화로운 곳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질적인 소유주는 한스 왕자였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여기 아니예요?"
안나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엘사는 안나를 지적하지 않았다. 맞다고 그녀에게 외치고 싶었지만, 부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에게 영지는 없었다. 그저 이름뿐인 영지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아니야. 따로 있어. 가지 않을 뿐이지."
"그곳들은 어딘데요?"
엘사는 다른 여섯 곳의 지역을 안나에게 말했다. 안나는 도서관에서 읽었던 기억들을 토대로 그 지역들에 대해 평가했다. 치안은 좋지 않았으며, 다른 지역들보다도 물가가 높고 세율이 높은 무법지대였다. 그곳이 엘사의 실질적이 영지였다.
"그럼 거기부터 살려야죠!"
안나가 목소리를 높였다. 방관자의 표식을 받은 자신 또한 비상식적이었지만, 남의 영지에서 남 좋은 일만 하는 엘사의 행동 또한 비상식적이었고, 그것이 복잡한 정치적 관계가 개입된다면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이었다.
"그야 난 꼭두각시인걸.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난 있을 곳이 없어."
침울한 표정으로, 무덤덤하게 엘사가 말했다.
"우리 어머닌 궁전의 하녀이셨지, 어쩌다 보니 아버님과 눈이 맞아 정분이 나셨고, 그 관계를 몇 년 동안 지속시키겼어. 결국 내가 세 살 때쯤에 되어서야, 어머닌 이제 막 태어난 내 동생을 데리고 왕궁에서 쫓겨나셨지. 나에게 이어진 피라고는 오직 아버님 뿐이고, 아버님은 그 과거를 치욕스럽게 여기시고 계셔. 당장이라도 날 내쫓고 싶어하시겠지만, 그렇기엔 귀족들의 눈치도 살펴야 할 거야.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못하는 왕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싶어하지 않을 테니까."
엘사가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그녀는 서랍에서 긴 담뱃대를 하나, 그리고 담배와 부싯돌을 꺼냈다. 파이프에 담배를 넣고 부싯돌을 몇 번 비비자, 이내 담뱃불이 파이프 끝에서 연기를 만들어 냈다. 엘사가 조심스럽게 담패를 피웠다. 향료를 재운 담배여서 후- 하고 뿜어져 나온 그녀의 연기에선 진한 장미의 향기가 방안을 자욱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연기가 매워 콜록거리며 담배 피우기를 포기한 엘사가 있었다.
"유일한 취미도 제대로 못한다니. 서럽구나. 그러고 보니, 네 취미를 물어보지 않았더구나. 네 취미가 무엇이냐?"
엘사가 서러움인지 매운 담배연기의 탓인지 눈물을 닦아내며 안나에게 물었다.
"사군토라면 제빵은 취미가 아닐 터고... 검술에 능하겠구나."
"아... 그리고 벽을 잘 타요,"
괜히 말했나? 안나는 말을 끌마칠 즈음, 그렇게 생각했다. 벽타기가 취미라는 건 이상했고, 주시자들이 좋아할 법한 '이단자스러운' 행위였다. 괜스레 땀을 삐질삐질 흘리려는 찰나, 엘사가 픕 하고 웃었다. 그녀를 만나고 처음 들어본 웃음소리였다. 안나는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몰랐다. 사람마다 웃음 코드가 달랐다지만, 어디서 그녀의 웃음을 이끌어 냈을까.
"원숭이처럼 말이니?"
엘사는 순수히 안나를 비유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안나는 그 말에 살짝 기분이 나빴다. 차라리 린든의 쓰레기라고 불리는 것이 기분이 덜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절반은 맞는 답이었고,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린든의 주민은 모두 쓰레기라고 생각할 터이니까.
"네...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죠."
"느낌은 어떠니?"
"네?"
안나의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리고 그녀가 했던 말을 기억했다. 그녀는 안나의 취미에 대해 묻고 있었다. 그러니 성심섬의껏 대답해야 할 것이었다.
"음...아주 시원하죠. 도로처럼 일정한 규칙 없이 지붕 위를 뛰어다니면서, 원하는 곳으로 단숨에 갈 수 있고... 또 지붕과 지붕 사이를 오갈 때 느껴지는 그 아찔함이 즐겁다고나 할까... 하하..."
안나는 더 이상 그 기분을 어떻게 묘사해야할지 몰라 멋쩍이 웃었다. 엘사도 웃었지만, 기쁨보단 부러움의 웃음을 짓고 있었다.
"말뿐이지만, 즐거워 보이는구나.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넌 자유로이 하고 있구나."
엘사는 창밖을 응시하며 슬픈 어조로 말했다. 안나는 그녀의 눈에서 보이지 않는 속박을 느낄 수 있었다. 남의 영지에 얹혀 살며, 남 좋은 정책을 하는 꼭두각시에게 자유란 게 있을까 싶었다. 안나는 그런 엘사에게 자유를 주고 싶었다. 완전한 자유는 아닐지라도, 숨이 트일 만한 자유를.
"음...그럼 공주님. 잠시만 귀 좀..."
안나가 엘사의 귀에 입을 가져가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건 안 될 거야. 경비가 삼엄하고, 이번에는 아버님의 허락이 있으셔서 겨우 나갈 수 있었는걸..."
엘사가 말끝을 흐렸다. 안나는 게르다의 존재를 상기시켰다. 넉살 좋은 아주머니같은 시종장은 안나의 연극에 적극적으로 동참해 줄 것 같았다. 게르다만 협조해 준다면, 나머진 엘사의 익명성과 안나의 기술로 헤쳐 나가면 그만이었다.
87.
"성 밖을 나가시겠다고요?"
"그러니까, 공주님이 여독을 푸신다는 것으로 오늘 정무를 쉬신다, 이말이예요. 경비들을 속이려고 하는 거니까, 어떻게 안 될까요?"
게르다는 당당한 수호경, 그리고 옆에서 쭈뼛거리며 서 있는 공주를 번갈아 바라봤다. 엘사의 외출, 그것은 오랜 시간 시종장으로 지내왔던 게르다가 바래온 바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그나르 황제와 영지의 실질적 영주인 한스 왕자는 그것을 불허했고, 엘사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유폐되다시피 성에서 갇혀 지내고 있었다. 그 누구도 엘사를 꺼내주려 하지 않았고, 그 무관심에 엘사 또한 스스로를 방 안에 가두었다.
"조심히 갔다 올 수 있겠어요? 어디로 가실 거죠?"
"어...음... 그러니까..."
'지붕!' 이라고 안나는 신나서 소리 칠 뻔 했다. 사실, 지붕으로 엘사를 이끄는 것은 무리였다. 안나는 나중에, 작은 벽부터 시작해서 소심한 엘사를 적극적인 엘사로 탈바꿈시키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밝혀야 하지만, 엘사와의 관계를 가까이 하는 것이 현재로썬 우선 순위에 두는 게 맞았다.
"시장에 가고, 분수대에서 뭐라도 사먹으면서... 장을 볼까 싶은데요."
"요리는 성의 전담 요리사가 있으니 하지 않아도 된다만."
"아뇨, 아뇨아뇨. 그냥 간식 같은 거예요. 제가 끝내주게 맛있는 간식 하나를 만들 줄 알거든요. 나중에 설명드릴 테니까. 음... 저희가 뒷문으로 나갈 수 있게 협조 좀 부탁 드려 주시겠어요?"
게르다는 안나의 요청에, 미소로 화답했다.
88.
"다비드!, 헨더슨! 문 주변에 쓰레기랑 오물 천지잖아! 치우지 않고 무얼 한 거야?"
창밖에서 게르다가 뒷문을 지키는 두 경비에게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경비들은 청소를 하기 위해 천천히 문에서 흩어졌고, 안나는 그때를 틈 타 후드를 뒤집어 쓰고 엘사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한 다음, 몸을 숙이고 빠르게 걸어가 문을 열었다. 엘사가 나오자마자, 안나는 아주 천천히 문을 닫았고, 겨우 휘익 하는 바람 소리만을 문고리에 남겼다. 안나는 엘사가 로브를 벗으려 하자, 다시 엘사의 로브를 뒤집어 씌웠다.
"아직 벗으시면 안 돼요. 아니, 최소한 오십 걸음은 걸은 다음에 벗어주세요."
안나는 공주의 옥체를 함부로 건든 것에 대한 질책을 받겠구나 싶었지만, 돌아오는 비난은 없었다. 안나가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자, 불안한 마음으로 숲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엘사가 있었다. 엘사의 손은 안나의 소맷자락을 꼭 쥐고 있었다. 안나는 하는 수 없이 엘사에게 잡히는 걸 허락한 뒤, 시내로 이어지는 숲길을 나아갔다. 전날 밤, 마치 두 사람을 집어삼킬듯이 우거진 숲은 낮에는 싱그러움 그 자체를 뽐내고 있었다. 고아원 뒷뜰의 과수원과는 다른, 넓게 퍼진 나뭇가지들이 마치 지붕의 차양처럼 따사로운 햇살 사이사이를 가리고 있었다.
"49.....50."
뒤에서 사락, 하고 로브 젖혀지는 소리가 들렸다. 안나가 뒤를 돌아보자, 엘사는 눈을 반쯤 감으며 숲 사이로 스며드는 자연의 녹음을 음취하고 있었다.
"너는 벗지 않는 거니?"
엘사가 여전히 로브를 쓰는 안나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안나는 고개를 저었다. 검술 대회의 우승자이면서도, 동시에 승자 자격이 박탈당한 사람이라 대중을 막론하고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을 것이었다. 대중에게 없는 사람으로 치부되는 공주와는 달리, 아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하는 노심초사의 평민이었다.
"전 아마...제 얼굴이 다 알려져서, 누가 알아보면 큰일이거든요."
엘사는 곧 안나의 말을 이해했다. 그리고 여전히 소맷자락을 놓지 않은 채, 이번에는 숲이 아닌 안나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길을 잃지 않게, 그녀를 잃지 않게.
89.
"자, 한 사람 당 빵 하나하고 절반에 수프 한 그릇씩이예요!"
한나가 어설프지만, 빽빽대며 줄을 서지 않고 몰려드는 린든의 빈민들에게 외쳤다.
"뭐야, 난 왜 국물밖에 없어!"
"난 채소 건더기 뿐이잖아!"
"야! 너, 너는 왜 고기가 많은 건데?"
크리스토프가 주의를 주어도,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한나에게 항의했다. 그저 통 속의 스튜를 휘휘 젓고 투박한 질그릇에 뜨기를 반복한 그녀는 별별 소리가 들어오는 항의에 해탈할 지경이었다. 오히려 화를 절제함으로써 주시자의 자세를 바로잡는 것 같았다. 그녀는 사실 카산드라가 겉으로는 정탐을 명령했지만, 흐릿한 자세와 절도를 유지하는 한나에게 일종의 대기 발령을 내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빵을 더 드리면 되겠어요?"
항의가 들어올 때마다, 한나는 빵을 몇 조각 더 주는 것으로 그들의 불만을 잠재웠다. 사실, 주시자의 사브레로 다시는 못 깨게 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최대한 자신이 주시자임을 들키지 말아야 했다. 벨은 어쩔 수 없다지마는, 자신의 목적을 밝히면 안 되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딱딱한 검은 빵을 먹어 와서인지, 흰빵을 고기처럼 조심스럽게 찢어먹는가 하면, 스프에 적셔 음미하는 사람들도 보았다. 그런 모습을 보자니, 한나 또한 배가 고파졌다. 새벽의 야음을 틈타 벨의 사무소에서 일어난 뒤, 문 앞 하수도에서 안나가 남겨 둔 마크를 통해 의원 앞 하수구로 나온 뒤 밥도 먹지 않고 요리를 준비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허기진 소리를 들었는지 옆에서 빵을 나눠주던 크리스토프가 그녀를 향해 돌아봤다.
"배고프면 잠시 들어가 있어요. 우리 분은 따로 남겨 뒀으니까요."
"힘들지 않겠어요?"
"뭘, 항상 그래왔던 일인데요. 아마 제가 하면 불평하는 사람들이 더 줄을 걸요?"
조금 기분이 나빴지만, 맞는 말이었다. 여리여리한 여자보다 덩치 큰 오크통같은 사내에게 대들 사람은 갱단원 말고는 없을 것이었다. 묶고 있던 두건을 푼 한나는 문을 열고 의원으로 들어왔다. 스튜를 담은 냄비와 큼직한 빵 두 덩이가 조제대에 놓여 있었다. 냄비에서 스튜를 국자로 떠 접시에 덜어낸 후, 치료를 받았던 침대에 걸터 앉아 빵과 같이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한나는 지금껏 먹어온 주시자들의 음식보다도 린든에서 먹었던 음식들이 더 맛있다고 생각했다. 어딘가 있을지 모르는 방관자의 흑마법에 걸리기라도 한 것일까?
하지만 한나는 지금껏 방관자가 음식에 흑마법을 펼쳤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그저 몸이 피곤하고, 신경도 날카로워져서 그런 탓일 거라 한나는 생각했다. 크리스토프 또한 어느정도 의지는 되었지만, 가장 의지할 만한 사람인 안나가 계획에도 없던 검술 대회를 하러 린든을 탈출한 게 가장 컸다. 그러고 보니, 검술 대회에서 안나가 입상했는지의 여부가 린든에 전해지지 않았다. 대대적으로 린든이 봉쇄된 만큼, 밀수는 더더욱 힘들 것이고, 오고 가는 정보 또한 극히 줄어들 것이 분명했다. 한나는 빈 접시를 개수대에 놓은 다음 다시 밖으로 나섰다. 한나가 식사를 해결한 사이에, 배식의 행렬은 상당히 줄어 한산해 있는 상태였다. 크리스토프는 한산해져도 여전히 서 있었고, 한나는 그런 그를 보며 한숨을 쉬며 의원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 스튜 접시와 빵을 가져온 그녀는 크리스토프에게 내밀었다.
"이따가 먹어도 되는데요."
"이따 언제요, 굶어 가면서 꼭 봉사활동을 하란 법은 없잖아요?"
"하기야, 그 말도 맞네요. 고마워요. 스튜 좀 저어 주시겠어요?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하려니 팔이 쑤시네요."
크리스토프가 국자를 내밀며 말했다. 한나는 말없이 그의 손에서 국자를 채 간 다음, 아직 한참 남아있는 스튜를 휘휘 저으며 보온을 유지시켰다. 오후가 지나자, 배식의 행렬은 완전히 끊겼고, 그들에게 남은 건 수십 그릇과 식기의 설거지였다.
'이걸 하루종일 해야 한다고?'
한나는 자신의 린든 적응법이 완전히 틀렸음을 체감했다. 새벽같이 일어나 오전처럼 일하고, 오후처럼 청소를 하는 그런 생활은 차라리 주시자들의 경전을 외우며 사는 게 훨씬 편할 정도였다. 대부분의 설거지는 크리스토프가 도맡아 했지만, 한나에게 누적된 피로는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피로였다. 양 어깨와 눈꺼풀에 각각 2kg, 500g의 추가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크리스토프의 체력은 한나의 예상보다 훨씬 좋았다는 것이었고, 설거지가 끝나자마자 지쳐 병실 침대에 누워버린 그녀를 직접 벨의 사무소에 데려다주기까지 했다. 그녀를 마중나온 벨은 퍽 웃으며 크리스토프의 등에 업혀 코를 고는 얼빠진 주시자를 부축했다.
"아무래도 시트라가 처음 하는 일이라 많이 힘든가 본데요. 계속 할 수나 있을지 모르겠어요."
"시트.. 아무튼 이 사람이 자진해서 하겠다는데, 뭐 어쩌겠니. 크리스토프, 바래다줘서 고맙구나. 가서 쉬려무나."
벨이 손을 흔들며 인사하자, 산과도 같은 금발 사내는 고개를 조금 숙이며 인사를 한 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한나 씨, 아니, 시트라 씨?"
벨은 어째서 한나가 시트라라고 불리는지 알지 못했지만, 지금 그녀의 일은 한나를 안나가 쓰던 침실로 데려가는 것이었다. 주시자의 복음활동을 하면서 주시자들에게 생존에 필요한 물자들을 공급받는 대신, 한나를 사무소에 묵게 해주게 했다. 한나는 벨의 어깨에 기대면서 비틀거리며 계단을 올라갔다.
"아...씨...씨이..."
"씨이?"
"씻어야하는데에...조금만...잘ㄹ...."
한나는 침실에 도달하자마자 젖 먹던 힘을 다해 침대라고 부르는 시트 위로 몸을 던졌다. 그녀가 입은 더블릿에는 스튜 비슷한 내음이 배어 있었지만, 그것을 눈치챘음에도 한나는 깊은 꿈나라로 빠져든 뒤였다. 벨은 그녀가 완전히 잠에 든 것을 확인한 후,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계단을 내려왔다. 그리고 1층 한쪽 벽에 있는 책장 중 책 하나를 기울이자, 삐걱 소리와 함께 책장이 살짝 열렸다. 그녀가 들어가려는 순간, 칼날 하나가 그녀의 목에 겨눠졌다.
"아, 벨 씨."
칼, 정확히는 손목에 달린 암살검을 사출한 사람은 멜리사였다. 그녀는 한나가 잠꼬대를 하며 방에 들어왔을 때, 1층의 로비에서 각 지역의 지부간의 상태와 암살단에 우호적인 주시자들의 목록을 확인하고 있었다. 간발의 차이로 그녀는 책장 속의 패닉 룸에 숨어들었고, 그 행동의 말미를 본 사람이 바로 벨이었다.
"하마터면 찌를 뻔 했어요."
멜리사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벨은 멜리사를 이해했다. 암호를 말하고 책을 당기는 것을 깜빡하고 잊어버린 탓이었다. 손목을 살짝 비틀자, 사출된 암살검은 다시 소매 속으로 들어갔다.
"주시자는 어떻게 됬어요?"
주시자는 한나를 말하는 것이었고, 암살단에 협력하는 주시자들은 존재하지만, 한나는 어떤 주시자인지 현재로썬 알 수 없었다. 멜리사의 동료들은 그녀를 죽여 후환을 없애자고 하지만, 그들의 멘토(암살자들의 스승 격의 역할을 하는 사람)인 멜리사는 되려 지켜보자는 입장이었다. 우호적이라면 바로 편입하면 되지만, 우호적이지 않다면 그녀를 통해 비협력파를 속일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해서였다.
"바로 곪아 떨어졌어요."
"우리에겐 다행이네요. 어서 들어오세요. 지켜봐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멜리사가 손짓하자, 벨은 책장 속 패닉 룸으로 들어갔다. 안쪽에 설치된 레버를 당기자, 책장은 천천히 닫혀, 이내 1층엔 아무도 없게 만들었다.
90.
"아메리고에서 독립 전쟁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왕이 재정적인 지원을 해준다는 선언이 오늘 오후에 누설되었더군요."
멜리사가 한 손으론 이마를, 다른 한 손으론 패닉룸 한가운데 책상에 놓여진 지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20억 크로네를 지원한다는 말도 오갔습니다."
멜리사의 옆에서 브랜든이라는 암살자가 덧붙였다. 황실의 사치에 싫증이 났고, 나중에 있을 후환이 두려워 암살자에 협력한 재무총감의 비서가 알려준 확실한 소식이었다.
"20억이면 린들의 기반 시설을 수리하고 상당 수의 집들을 재보수할 수 있을 돈인데, 그걸?"
벨이 어이없어하는 투로 말했다. 그녀로썬 왕이 왜 그러는지 알 것 같았다. 아메리고 대륙은 잠재적인 지하자원이 풍부한 데다가, 그곳에 정착했던 정착민들의 세력 또한 날이 갈수록 확장되어 갔기에, 승산이 있는 도박에 걸은 것 뿐이었다. 하지만, 그 도박에는 수십, 수백, 더 나아가 수천 명의 끼니를 보장할 수 있는 돈이었다. 원래 죽어있던 린든은 썩지 않는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속되는 역병으로 유지되던 피부조차 조금씩 썩어문드러지고 있었다. 하물며 살아있는 다른 지역들은 죽어가는 속도가 체감이 될 것이 분명했다.
"루나드 선왕이 빌어먹을 사치를 즐기다 가셨죠. 짐이 국가? 짐이 빛이다? 국가의 빚이겠죠. 씨발."
브랜든이 벨의 말을 거들었다. 그랬다. 현 아그나르 황제의 아버지인 루나드 황제는 궁전을 신축하느라 천문학적인 돈을 썼고, 천문학적인 사치를 해 왔다. 이러한 지출로 루나드 말기에 재정은 바닥을 치고 있었고, 아그나르의 때에는 재정 수입이 매년 적자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황실은 사치를 금하지 않았고, 도리어 죽어나가는 건 백성들이었다. 반으로 떨어진 실질적인 임금의 80퍼센트가 주식인 빵으로 빠져나가는 형편이었다. 때마침 최근 2년간의 혹독한 겨울과 추위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엘사 공주에 대한 저주의 수위를 높여나갔고, 생산이 감소된 농작물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솟아올랐다.
혹자는 말했다. 누군가 분노를 조장하기 위해 곡물을 통제하고 있다고. 하지만 증거가 없었다. 오로지 심증 뿐이라, 물증이 되어야 할 곡식들은 시장에 떴다 하면 출처를 알기도 전에 약탈되기 십상이었다.
"이게 다 엘사 공주 때문입니다. 그녀의 영지를 보면, 범죄 발생률이 지금껏 통계로 기록한 이래로 가장 높은 수치를 보이고 있어요."
멜리사는 엘사가 가지고 있는 실질적인 영지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이건 연막이죠. 그녀는 꼭두각시인건 다들 아시리라고 믿겠습니다. 그녀는 현재 한스 왕자의 영지에 은거하고 있어요. 은거하면서 좋은 정책들을 내세우지만, 선언서와 서명서에는 언제나 한스의 인장이 찍혀지죠."
멜리사가 지도 한 켠에 스케치한, 두 개의 인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나는 튤립 속의 눈송이, 다른 하나는 튤립 속의 칼이 그려져 있었다. 엘사와 한스의 인장이었다.
"아마 예견하건대, 우리의 일의 가장 큰 희생양은 엘사 공주가 될 겁니다. 그녀가 죽더라도, 아무도 슬퍼할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말이예요. 기껏해야 우리가 기억할까 싶습니다."
"그리고 그 엘사 공주의 경호원으로 안나가 채용된 모양이고요."
멜리사의 말에, 벨의 두 눈이 커졌다.
"잠, 잠시만요. 안나가 누구 경호원으로 들어갔다고요?"
"엘사 공주요. 그 꼭두각시 공주 말이예요. 안나가 그 꼭두각시의 칼이 되었단 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