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mall Town Sisters. 본편+외전
서문.
같은 공간에서 산다는 것은, 하루에 몇 번이라도 마주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의도적으로 피했고, 나 또한 그녀의 앞에 나타나려 하지 않았다. 모두 내 잘못이기 때문이다. 내가 부적절한 사랑을 고백했기 때문이다.
석 달. 시간이 해결해주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다.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충동적으로 뱉은 용서받지 못할 고백과 안나의 표정.
때문에, 지금처럼 우연히 거실 소파에 누워있던 안나를 볼 때도 인사 없이 조용히 바라볼 뿐이다. 그녀가 낮잠에 빠진 덕에 뭘 보냐는 가시 돋친 그녀의 말 대신, 조용한 숨소리와 따뜻한 햇볕에 데워진 낮 공기만 거실에 남아 있다.
이렇게 조용하게 안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눈을 감고 잠든 너는 귀여웠고, 사랑스러웠다. 햇빛을 받아 붉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볼에 붙어있었다. 소중한 네게 더 다가가고 싶었지만, 괜히 깨울 것 같아 그러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인내가 무색하게도 안나는 홀로 뒤척이다가 눈을 떴다.
안나는 손으로 눈 주변을 누르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작게 앓는 소리가 들렸다. 조용히 도망칠까 고민하던 순간, 통로에 서 있는 채로 눈이 마주쳤다. 순식간에 그녀의 감정이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안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내 어깨를 치고 2층으로 올라갔다. 발소리는 빠르게 멀어진다.
만 19살이 되던 지난 내 생일날. 바로 그 날이었다. 그 찰나의 시간으로 지난 18년 동안의 인생은 완전히 뒤집혔다. 이틀 뒤 있었던 크리스마스는 인생 최악의 파티가 되었다.
대학으로 떠나기 전, 갑자기 변해버리는 환경과 성인이 되었다는 혼란 때문이었다. 꾹 눌러 담아둔 탓에, 그만 넘쳐 흘러버린 것이다. 바보같이 그것 하나 통제하지 못해서 눌러왔던 마음이 튀어나와 버렸다.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돌아갈 수 있더라고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멀어졌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 감정을 전한다는 것은,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아흔아홉 개의 슬픔 속에 단 하나의 해방감이 나를 붙들었다.
안나가 누워있던 자리 앞으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앞으로 몸을 뉘어 소파에 안겼다. 그곳에 얼굴을 파묻었다. 안나의 냄새가 남아 있었다. 조금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아랫배가 저릿했다.
대학에 입학하고 한 달 만에 대학교를 휴학하게 된 건, 나에 대한 소문이 생겨서였다. 내가 레즈비언이라는 질 나쁜 소문이다. 고발자는 대학 커뮤니티에 올라온 익명의 게시글이었고, 그 글을 보자마자 안나가 올린 것임을 눈치챘다.
학교 커뮤니티에 익명으로 올라온 글은 하루도 되지 않아 사라졌지만, 사람들의 기억에서는 아니었다. 작은 씨앗은 눈덩이처럼 굴러갔고, 말도 되지 않는 이상한 소문까지 났다, 그 소문을 믿고 기분 나쁘게 치근덕거리는 사람도 생겨났다. 누군가 던진 물감 섞은 물풍선에 맞은 날, 결국 휴학을 결정했다. 그렇게 다시 이 집으로 돌아왔다. 부모님은 별말 없이 나를 받아주셨다. 몇 주 전의 일이었다.
소파에 파묻혀 숨을 들이쉴 때마다 안나의 냄새가 몸으로 스며들었다. 그 향기에 뇌는 흥분했고, 자연스레 손은 아래로 향했다. 허리를 세우고 어깨로 무게를 버텼다. 더욱 짙게 그 향을 맡고 싶어 소파 깊은 곳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안나.’
‘안나. 미안해.’
손은 반복적이고 강하게 움직였다. 숨이 점점 차올랐지만, 안나의 향기가 날아갈까 신음과 함께 삼켰다.
‘안나. 안나.’
짧은 절정에 몸이 움찔거렸다. 쾌락 후의 여운 때문에 허벅지의 근육이 제멋대로 수축했다 풀어짐을 반복했다. 해가 구름에 가려졌는지 창밖으로 들어오던 햇빛이 사라지고 그늘이 거실을 가렸다.
몰려드는 나른함에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꿇고 있는 무릎이 아파져 바닥에 누웠다. 켜지지 않은 전등이 있는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바지 속에 있던 손을 들어 올렸다. 투명한 실이 손가락 사이로 이어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하, 시발. 욕지기가 올라왔다. 다른 팔로 눈을 가렸다.
1.
출근 전, 옷장을 열어 잠시 고민하다가 무난한 남색 셔츠와 데님 바지를 꺼내 입었다. 유니폼도 꺼내 챙기고는 책상 위에 두었던 차 키를 챙겼다. 마당에 세워진 흰색 차에 타고 시동을 걸었다. 자동으로 넣어져 있던 CD플레이어에서 노래가 나왔다. 후진으로 능숙하게 차를 빼고 출발했다. 일자로 뻗은 도로 위에서 작게 노래를 따라 흥얼거렸다.
미스터 오큰은 지금 엘사가 아르바이트하는 스포츠용품 센터의 매니저다. 들어오자마자 마주친 오큰에게 인사하며 출근 카드를 찍고 탈의실로 들어갔다. 상의만 있는 하늘색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나와 지나가며 마주친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업무를 시작했다.
스캐너로 바코드를 찍어 확인하며 일을 시작했다. 입구와 가까이 있어서 들어오는 손님에게 인사를 하다가 안나를 발견하고 놀라 스캐너를 놓칠 뻔했다. 안나는 멍청하게 생긴 금발 남자와 함께 입구로 들어왔다.
다행히 다른 손님들에게 건네는 것과 같은 인사를 했고, 여느 손님처럼 돌아오는 인사는 없었다. 안나와 눈이 마주쳤지만, 그 이상은 없었다. 지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곁눈질하며 재고 확인 작업을 마무리했다.
“저기요, 남성용 신발을 찾고 있는데요. 어디 있나요?”
스캐너를 허리춤에 차고 창고 쪽으로 이동하려는데, 안나의 일행이었던 금발 남자가 붙잡았다. 최대한 안나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도록 의식하며 남자가 찾고 있는 제품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남자는 짧은 인사와 함께 떠났고, 나는 창고로 향했다, 다행히 창고에서 일을 마치고 나온 뒤에는 보이지 않았다.
일을 마치고, 집 앞에 주차했을 때는 밤 8시가 넘어서였다. 센터 근처에 있는 푸드 트럭에서 산 음식을 차 안에서 먹으며 저녁을 때웠기에 배는 고프지 않았다. 쓰레기를 챙겨 외부 쓰레기통에 버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저 왔어요.”
어두운 실내였기에 대답은 없었다. 평소에도 부모님 모두 늦게 귀가했고, 안나는 있어도 대답하지 않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문이 열린 안나의 방이 보였다. 불이 꺼지고 방의 주인은 자리에 없었다. 설마, 아직도 그 멍청한 금발이랑 같이 있는 걸까. 속으로 저주를 퍼부었다.
괜히 손을 뻗어 문을 살짝 밀었다. 소리 없이 밀려나며 복도 전등의 문에 잘린 네모난 빛과 내 그림자가 바닥에 깔렸다. 그 경계선을 넘어가지 않고, 복도에 서서 안나의 방 안을 바라보았다. 참대 아래쪽으로 천 쪼가리가 하나 보였다. 안나가 학교에서 운동할 때 쓰는 수건임을 눈치챘다, 아직 세탁 전이라는 것도 한눈에 알았다.
솔직히 말하면 저 수건을 꺼내오고 싶었다. 그것이 사라지더라고 주인은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그저 수건 하나일 뿐이니까. 그렇게 믿고 싶었다. 결국 수건을 들고나왔다. 손에 들린 수건에서는 안나의 향기가 났다.
2.
다음날, 씻고 나와 생긴 빨래와 안나의 수건을 함께 빨래통에 던져넣었다. 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 나오기 전에 부엌에 놓여있던 빵 한 덩어리를 챙겨 차에서 아침을 때웠다. 스포츠용품점에 도착했음에도 시간이 많이 남았다. 일찍 출발한 덕에 여유가 있었다. 차 키를 빼고 조수석으로 옮겨 앉았다.
조수석에 두었던 책을 집어 들었다. 고등학교에서 쓰던 수학 교과서다. 샤프가 끼워진 페이지를 찾아 펼쳤다. 근무시간 전까지 시간을 때울 생각이었다. 학생 때부터 공부는 일종의 취미였다. 도피처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있어 좋았다.
잠시 뒤 주변을 살펴보니 주차장에 차량이 조금 늘었다. 직원들의 차량일 것이다. 책을 덮고 뒷좌석으로 던져놓았다. 차를 나와 센터로 출근했다.
매니저 오큰이 출근해있었다. 그에게 인사하며 출근 카드를 찍었고, 오큰은 오늘부터 새로운 직원이 출근했다며 소개했다. 금발과 갈색 사이의 머리카락과 하얀 피부, 어디선가 본, 아는 얼굴이었다.
“엘레나 스완이라고 합니다. 엘렌이라고 불러주세요.”
“네, 반갑습니다. 엘사 아란델입니다.”
고등학교 3학년 여름, 내게 고백했던 동창이었다. 악수하며 인사했다. 오큰은 엘렌의 담당 구역을 알려주고, 내게 하루 동안 함께 다니며 교육을 부탁했다. 알겠다고 대답하며 장갑과 스캐너 두 세트를 챙기고, 엘렌에게 장갑을 건네며 같이 가자고 이야기했다.
엘렌의 구역은 엘사의 구역과 달랐지만, 이 가게의 기본적인 업무 내용은 같았고, 다른 구역의 업무도 알고 있기에 가능했다. 스캐너의 작동법을 먼저 가르치기 위해 들고 있던 것 중 하나를 엘렌에게 건넸다.
“엘사. 맞지? 우리 같은 학교였는데.”
“응. 잘 지냈어?”
둘만 있게 되자 엘렌이 먼저 말을 꺼냈다. 생글 웃는 얼굴이다. 엘렌도 알아본 모양이다. 반가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머쓱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대학에 갔다고 들었는데, 여기서 만날 줄 몰랐어.”
“휴학했어. 사정이 있어서. 너는 어떻게 지냈어?”
“계속 일자리 구하면서, 그냥저냥. 너는? 너는 언제까지 있는 거야?”
“아직 정해진 건 없어. 내년에 복학할 수도 있고. 다른 학교로 갈 수도 있고.”
“그래. 너 공부 되게 잘했잖아. 인기도 많았고.”
“내가? 에이.”
“졸업 파티 퀸까지 했으면서. 다시 못 만날 줄 알았는데.”
“하하, 너도 인기 많았잖아. 기억나는걸.”
“그래. 그랬었지. 엘사, 이따가 퇴근하고 식사라도 같이할래? 내가 살게.”
오늘 퇴근하더라도 지난 7일간 겪었던 홈리스 체험처럼 차 안에서 아침처럼 시간이나 때우며 기다리다가 돌아갈 계획이었다. 그렇기에 별생각 없이 승낙했다.
“그래. 이거 먼저 설명하고. 스캐너 사용법부터 알려줄게.”
“좋아. 그래. 좋아, 하하.”
“그리고 사주지 않아도 돼. 더치페이할게.”
엘렌은 웃음이 가시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녀에게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주고 스캐너의 사용법과 센터 내의 규칙 등을 먼저 설명해주었다.
퇴근 후, 근처 식당을 가려다가 예약을 하지 않아 많이 기다려야 된다는 직원의 대답에 결국 자주 가는 푸드 트럭으로 향했다. 근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음식을 구매해서 차로 돌아왔다. 그 안에서 짧은 대화와 함께 식사하고는 엘렌을 다시 센터 주차장으로 데려다주었다. 그녀는 고맙다며 인사하고 자신의 차에 올라탔다. 그녀의 손 인사에 손을 흔들어주고는 차를 출발했다.
3.
평일이 지나고 주말이 되었다. 오랜만에 가족이 모두 쉬는 휴일이었지만, 거실의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빠르게 상황을 파악해보니 안나의 모의고사 성적표가 나온 모양이었다. 어머니의 표정을 보면 완전히 망한 점수인 것 같다. 조용히 그 앞을 지나가려는데, 어머니의 말이 한 발 더 앞섰다.
“엘사! 안나한테 공부 좀 가르치렴.”
“싫어요!”
내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안나가 옆에서 외쳤다. 그러나 큰 의미는 없을 것이다. 나는 그저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조용히 있었다. 어머니는 강경했다. 절대 안 된다던 안나도 결국 외출금지령 없이, 이 집에서 계속 지낼 수 있으려면 어머니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아마 내가 거절한다고 하면 이 집을 나갈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안나의 반대에 힘입어 어머니의 강경책이 시행되었다. 당장 오늘부터 안나의 과외 선생이 되기로 했다. 부모님은 잘해 보라면서 이야기하고는 살 것이 있어 한동안 나갔다 오겠다고 했다. 현관을 나가기 전, 안나에게는 용돈이 걸린 살벌한 경고가 뒤따랐다.
부엌 식탁에 앉아 안나가 가지고 내려온 책들을 살펴보며 종이에 계획서를 작성했다. 로드맵이 있으면 더 편할 거 같았기에 대충이라도 작성하려고 했다. 안나는 식탁에 옆으로 머리를 기대고 나를 보고 있었다. 괜히 긴장되어 말을 붙였다. 침묵보다는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왜?”
“…그냥.”
“…….”
“공부 잘하는 거, 부러워서.”
“음, 고마워.”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맨날 상도 받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했었구나. 하지만 그런 관계를 망쳐 버렸다는 생각도 뒤따라 다른 의미의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겉으로 티 내지 않고 계획 작성을 계속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뒤로 말이 없었다. 종이에 글씨를 쓰던 손을 멈추고 시선을 돌렸다. 안나는 자세를 고쳐 앉아 팔짱을 끼고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의 침묵에 입 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안나는 본인이 만든 짧은 정적을 깼다.
“나랑 섹스하고 싶은 것 같아.”
“…안나,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좋다며?”
“안나. 좋아한다고 무조건 그걸 하고 싶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그래?”
“그리고 너는 아직 어리고, 학생이야. 그런 말을 하는 건 옳지 않아.”
“옳지 않다고?”
“그래.”
“그럼 언니가 고백한 건?”
“안나.”
“나는 언니의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뿐이야.”
“그건 잘못된 거야. 미안해. 나 때문에, 네가 지금 혼란스러워하는 거야. 내….”
“아니. 아니야. 나는 그저, 다시 한번 솔직하게 말했으면 하는 거야. 언니가 원하는걸.”
“…원하는 거 없어. 그냥, …그 얘기는 그만했으면 좋겠어. 안나. 잊…,”
갑자기 안나가 그녀와 가까운 탁자 위에 있던 내 왼손을 잡고 깍지를 꼈다. 나오려던 말이 사라졌다. 당황스러웠지만 감히 움직이거나 깍지를 풀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지난 고백 이후 닿는 것 조차 피했었다. 올해 처음으로 안나와 닿은 것이다. 부드럽고 따뜻하다. 그녀는 손가락을 움직여 내 손을 주물렀다. 무의식적으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안나에게 들키기 전에 고개를 돌렸다.
“진짜?”
안나는 손을 움직여 그녀의 오른쪽 손바닥 위에 내 왼손을 올려놓고 손끝으로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기분 좋은 간지럼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와 척추를 지났다. 간지럼이 느껴지는 순간마다 아래가 움찔거렸다. 목 뒤의 털이 솟는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안나가 손을 떼었다. 상실감을 티 내지 않으려, 들뜬 날숨이 내뱉어지지 않도록 호흡을 조절했다.
“아닌 거 같은데.”
오므려진 입술을 의식하고 입가를 바로 했다. 아니라고 말을 꺼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입을 여는 순간 솔직한 욕망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하면 그 손에, 젠장. 이성을 찾아야 했다. 안나를 바닥으로 끌어낼 수는 없다.
“…아니. 진짜로 없어.”
안나는 내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황급히 팔을 교차시키며 얼굴을 가렸다. 그 팔 위로 안나의 손이 올라왔다. 안나의 손에 쉽게 무장이 해제되었다.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얼굴이 드러났다. 안나는 양팔을 잡은 손을 놓지 않고 나를 바라보다가 그 손을 놓아주었다.
“만약에, 내가 같은 감정이라면?”
“….”
“나도 언니를….”
“아니. 안나.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네가 착각하는 거야.”
“…뭐?”
“…내가 한 말 때문에 네가 착각하는 거야. 그건, 잘못된 거니까. 그러니까…,”
“….”
“내가 미안해. 내가 너를 착각하게 만든 거야.”
안나는 나를 바라보았다. 상처받은 얼굴이다. 나는 애써 그것을 외면했다. 안나가 나와 같은 사람이 되면 안 된다. 그건, 큰 죄를 짓는 것과 같다. 잘못된 인간은 나 하나여야 했는데. 처음으로 고백이 후회되었다. 내 탓이다.
안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나는 자리에 남아 탁자 위를 바라보았다. 놓인 책들 사이에 쓰다 만 종이가 보인다. 나는 새 종이를 꺼내 안나에게 하루에 공부할 분량을 적고 모르는 것은 표시해두라고 적어두었다.
책들을 안나의 방에 옮겨 두고, 돌아온 부모님에게는 앞으로 잘할 거라며 이야기했다. 다시 마주친 안나는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외면이 오히려 편하게 느껴졌다.
4.
살면서 다시 볼 일 없으리라 생각했던 금발 멍청이를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이 집에서 말이다. 마당 앞으로 주차하는 차 소리에 창밖을 확인해보니 지난번 매장에서 보았던 금발 멍청이가 차에서 내리는 것이 보였다.
그는 칙칙한 짙은 회색 셔츠를 입고 같은 색의 모자를 쓰고 있었다. 한 손에는 남색 가방을 들고 우리 집 문으로 걸어왔다. 안나는 그가 문을 두드리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한 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1층으로 내려갔다. 발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부엌으로 들어왔다. 괜히 냉장고 문을 열어보고 전기 포트에 생수를 담아 물을 끓였다. 안나가 있는 입구 근처 소파가 있는 거실에서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둘은 영화를 보고 있는지 대화 소리가 섞여 들렸다.
커다란 머그잔을 꺼내서 아무 티백이나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차가 우러나기를 기다리며 부엌의 돌출된 선반에 한쪽 팔로 상체를 지지해 기대어 서 있었다. 티백에서 진한 갈색의 찻물이 우려지며 퍼졌다.
시선은 머그잔의 작은 동그라미 안에 머물렀지만, 그 외의 감각은 모두 거실로 날카롭게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거실에서 들려오는 작은 신음을 놓치지 않고 들을 수 있었다. 영화에서 나오는 것인지 안나의 것인지 헷갈렸다. 설마 아니겠지.
순간 안나가 키스하는 장면이 상상되었다. 그저 쾌락에 들뜬 안나의 얼굴이 그려졌다. 시발. 안돼. 지금은 안된다고.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하필이면 안나가 내 손을 잡았을 때가 생각났다. 흥분이 나를 감쌌고, 등에서 저릿한 감각이 타고 올라왔다.
지독한 자괴감이 들었음에도 결국 손은 아래로 향했다. 선반에 기대에 있는 팔을 굽혀 그 위에 엎드렸다. 다른 손으로 바지 위를 주무르다가 한 손으로 버클을 풀었다.
시발. 안돼. 멈춰. 이성은 외쳤지만, 손은 속옷 위를 지분댔다. 달뜬 숨이 내뱉어지며 선반 위에 습기가 맺혔다 사라졌다. 결국 다리에 힘을 풀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타일 바닥으로 찬기가 느껴졌지만, 체온에서 나오는 열기가 뜨거워 오히려 기분 좋았다.
눈을 감고 계속해서 안나를 상상했다. 신음이 새어나갈까 다른 손으로는 입을 막았다. 눈을 감았다. 안나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이 떠오르자 손가락이 빨라졌다.
결국 절정을 느꼈다. 이를 악물었다가 힘을 풀며 들뜬 숨을 내뱉었다. 천천히 진정되는 감각들 사이에서 눈을 떴다. 그제야 안나가 부엌에 서 있는 것을 알았다. 안나는 한 손에 플라스틱 우유병을 들고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보고 있던 걸까.
시발. 차라리 방에서 할걸. 하지만 이미 늦었다. 젖은 손을 등 뒤로 숨겼다. 안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 또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몇 초인지 몇 분인지 모르겠다. 나를 내려다보던 안나가 손에 들고 있던 우유병을 기울였고, 그 안에서 흰 액체가 쏟아져 내 몸을 적셨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안나의 발이 아래를 눌렀다. 안나의 오른쪽 발이 잦은 속옷 위로 느껴졌다. 안나의 양말도 젖어갔다. 조금 전까지의 자극으로 예민해져 있어서인지 더 느껴졌다. 하, 하는 들뜬 신음이 새어 나왔다. 안나는 서 있는 채로, 발가락을 계속해서 눌렀다 움직이며 쾌락을 주었다. 그때 거실에서 안나를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안나! 혹시 없으면 다른 것도 괜찮아!”
“아냐! 크리스토프. 없긴 한데, 내가 먹고 싶어! 마트에 좀 다녀올 수 있어?”
“알았어! 금방 다녀올게.”
안나는 시선을 돌리지 않고 입으로는 거실에 있을 금발 남자에게 말했지만, 오히려 발에 힘을 주어 꾹 누르며 자극했다. 그 자극에 허리가 구부러지며 상체가 안나의 종아리에 매달렸다. 이를 악물었다. 현관 쪽에서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났다.
“뭐 하자는 거야?”
안나는 엄지발가락을 조금 움직였다.
“원하는 거 없다며? 그런데, 이건 뭐야? 몰래 엿들으면서 자위? 하.”
변명도,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어떤 대답을 하던 안나가 멈춰버릴 것 같았다. 그것만은 싫었다. 안나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내 다리 사이에 있던 발을 들어 종아리에 매달려 있던 내 어깨를 밟고 밀었다. 그 힘에 뒤로 밀려나며 선반에 등이 닿았다.
“아…, 안…”
상실감에 입을 열었다가 황급히 다물었다. 안나가 발을 떼자 입고 있던 셔츠 위로 젖은 발자국 모양이 찍혔다.
“하…. 엘사. 고개 들어.”
안나의 말을 따라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안나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낯설었다. 아니, 얼마 전 보았던 눈빛이다. 손끝 하나조차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안나는 만족스러웠는지, 아니면 그녀 또한 기다릴 수 없었는지 다시 발로 아래를 지분댔다. 그 자극에 나오려는 신음을 참으려 오른손으로 입을 가렸다. 안나는 그 손을 붙잡아 치웠다.
“어차피, 아무도 없잖아.”
그 말에 올라오려던 신음을 내뱉었다. 팔을 놓아주지 않은 채로 안나는 더욱 세게 아래를 자극했다. 결국 안나의 팔뚝을 붙잡고 매달렸다. 계속되는 자극에 또다시 절정을 느꼈다. 두 번째였지만 순간적으로 시야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강렬했다. 바닥에 흥건하던 우유 가운데로 투명한 액체가 새어 나오며 섞여 흘렀다.
끝을 보았음에도 안나는 여전히 오른손을 놓지 않고 조금 허리를 숙였다. 그녀의 상체가 전등을 조금 가려 내 몸 위로 그림자가 졌다. 고개를 들라는 듯 팔을 잡아당긴다. 조금 멍한 얼굴로 안나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풀려 그녀의 표정이 초점에 잘 맞지 않아 흐릿했다. 뒤로 보이는 전등 불빛에 더욱 분간하기 어렵게 느껴졌다.
“사실, 그날 다 봤어. 거실 소파에서, 내가 자던 자리에서 언니가 자위한 거.”
시야가 점점 선명해진다. 안나는 조금 미간을 구긴 것 같았다. 입꼬리는 어땠지? 안나는 허리를 숙여 젖은 양말을 벗었다. 축축이 젖은 양말이 내 앞에 떨어졌다.
“그리고 내 수건도. 하…. 그래놓고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안나는 부엌을 나가기 전, 개수대의 앞에 걸려있던 수건을 풀어 나에게로 던졌다.
“알아서 치워.”
안나는 뒤돌아 부엌을 나갔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5.
아직 해가 지지 않은 여름 저녁. 어머니가 자주 하시는 소고기 스튜와 생채소로 만든 샐러드, 내가 퇴근길에 사 온 빵으로 된 식사가 식탁에 차려졌다.
지난 일주일간 안나를 피했다. 집에서는 잠만 자고 센터와 도서관에서 거의 시간을 보냈다. 그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마주치지 않았다. 원래 잠깐씩밖에 보지 못하는 부모님이었지만, 일주일간 얼굴을 보지 못하니 먼저 이야기를 꺼내셨다. 아침에 출근하기 전, 어머니가 나를 붙잡고 얼굴 보기가 너무 힘들다며, 오늘은 저녁을 꼭 같이 먹자고 약속을 받아냈다.
네 명의 가족 모두 자리에 앉았고, 안나는 식탁 맞은편에 있었다. 아버지는 먹기도 전에 스튜를 칭찬했고, 어머니는 그 말에 웃으며 얼른 먹으라고 말했다. 안나는 짧게 감사 인사를 하며 빵을 집어 들었다.
스푼을 들고 스튜를 떠먹었다. 익숙하고 맛있는 맛이다. 각자 식사에 집중하며 조용히 식사를 마쳤다. 식사 중에는 대화를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고, 식사 후에는 후식을 먹는 것 또한 그랬다. 아버지는 후식을 먹자고 말했다.
나와 어머니는 아이스크림을 골랐고, 아버지와 안나는 차를 마시겠다고 했다. 나는 앉아 계시라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스크림꺼내고 포트에 물을 담았다. 불에 올려둔 사이 부드러워진 아이스크림을 떠서 티스푼을 꽃아 식탁으로 나르고, 다시 돌아가 페퍼민트 티백을 넣은 머그잔에 물을 부었다. 민트향이 주변으로 퍼졌다. 양손으로 하나씩 들고 식탁으로 앉으며 건넸다.
“고맙다. 엘사, 한동안 얼굴 보기 힘들더구나. 바빴니?”
“음, 네. 센터에 사람이 갑자기 그만둬서요. 정신이 없었네요.”
아버지는 따뜻한 잔 손잡이를 쥐고 내게 말했다. 엘사는 별일 아니라는 투로 대답했다. 아버지는 그래, 하고 대답하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맞은편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던 어머니가 이어받아 이야기했다.
“어떠니, 둘이 같이 공부할 만하니?”
그 질문에 대답한 것은 안나였다.
“네. 언니가 잘 가르치더라고요. 오늘도 같이 공부하기로 했어요. 그렇지?”
“엘사, 많이 바빴을 텐데, 고맙구나.”
“아니에요.”
금시초문이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으로 넘어가는 아이스크림에서 차가운 감촉만 느껴졌다. 안나는 두 손으로 잔을 감싸며 잡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별일 아닌 얘기를 조금 더 하다가 2층으로 올라갔다. 아버지가 설거지는 두고 얼른 공부하라며 안나와 함께 부엌에서 밀어냈다.
계단을 오르며 뒤따라 올라오는 안나에게 시선을 주지 않으려 앞만 쳐다보았다.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을 때, 안나가 팔목을 붙잡았다. 찻잔을 잡고 있어서인지 평소보다 뜨거웠다. 문을 열려던 손을 멈추고 안나를 돌아봤다.
“저기, 언니. 공부. 안 알려줄 거야?”
“…어려운 거 있어?”
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을 꾹 물었다가 공책을 챙겨 들고 방으로 가겠다고 대답했다. 잡혀있던 손이 풀렸다. 방 안에서 필기구와 의자를 챙겨 들고 열려있던 안나의 방으로 들어갔다. 안나는 의자를 받아 책상 옆으로 놓아두었다.
문을 닫고 자리에 앉으며 책상 위에 펼쳐져 있던 문제집을 보았다. 수학책이었는데, 그사이 공부를 했는지 지난번보다 페이지가 바뀐 것 같았다. 펜을 잡으며 말을 꺼냈다.
“문제부터 보여줄래?”
“왜 날 피해 다녔어?”
그런 질문을 말한 게 아님을 알면서도 안나는 이야기했다. 안나의 시선은 책상 위에 있는 책이 아니라 나를 향해있었다.
집중을 위해 전등을 끈 채로 스탠드 조명만 켜 둔 탓에 분위기 또한 가라앉는 듯했다. 안나의 얼굴로 빛이 비쳐 보였으나, 그 뒤는 어두웠다. 내가 그녀를 보는 것처럼 안나도 나를 보겠지.
“…안 피했어. 바빴을 뿐이야.”
“진짜로? 그동안 언니 발소리도 듣지 못한 게 우연이라고?”
안나는 팔짱을 끼며 바라보았다. 더 발뺌해야 했다. 그것이 맞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미 바닥을 보였지만, 안나는 내 앞에 앉아 있잖아. 나를 붙잡았잖아. 그렇다면 끝난 거 아니야? 달콤한 열매를 먹는 것만 남았어. 하지만 그 속에 든 것은 독이었다. 나와 안나 모두 불행하게 만들 나락의 시작이다.
수많은 생각 속에서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했고, 결국 안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렵네.”
“….”
“내가 생각한 것보다 많이.”
“….”
“나는 내가 받아들이면 된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부정당했었지. 기억나?”
“…응.”
“그 뒤로 많이 생각해봤어. 언니가 한 말도, 내 감정도.”
“안나.”
“있잖아, 언니. 이제 그냥 다 때려치우려고.”
안나는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놀라 손을 빼려고 했지만 안나가 꽉 쥐어 그러지 못했다. 목 뒤의 털이 곤두서는 기분이 들었다. 안나의 눈에서 기이한 감정이 느껴지는 듯했다. 안나는 시선을 돌리지 않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엘사.”
“….”
“키스해줘.”
“…그건, 안돼. 미안. 미안해.”
“내가, 원하는데도?”
안나와 눈을 맞췄지만, 그녀의 말을 들어줄 수 없어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피식 웃는듯한 숨을 내쉬었다. 한숨인지 웃음인지 그 의도를 알고 싶었다.
“…그래, 그럼. 마음대로 해.”
“….”
“나도 그럴 거니까.”
안나는 순식간에 내 멱살을 잡고 앞으로 잡아당겨 키스했다. 잡고 있던 손은 깍지끼며 손가락 사이를 주물렀다. 손등으로 안나의 손끝이 느껴졌다.
잡아 당겨진 셔츠 때문에 뒤로 물러날 수 없었다. 다행이었다. 눈앞에는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가까웠다. 안나의 입술이 느껴졌고, 그 안의 살덩이가 입 안으로 느껴졌다. 뜨겁게 느껴지는 안나를 받아들였다. 그녀의 입술이 떨어졌을 때, 나도 모르게 숨을 헐떡였다.
“…언니도 나를 원하고 있잖아.”
송곳이 나를 후벼팠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나는 내 안의 괴물을 만들었고, 그것을 통제하지 못했다. 죄인이었다. 안나가 잘못된 선택을 하게 만들었다. 모두 내 탓이었고, 그녀의 말이 나를 깨닫게 했다.
의자에서 일어나 뒷걸음질 쳤다. 어떤 얼굴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다.
안나의 손이 몸에 닿자 깜짝 놀랐다. 안나는 내 손목을 잡고 다시 한번 키스하려고 했다. 잡히지 않은 손으로 그 입을 막았다. 안나는 불만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손바닥을 핥아 올렸다. 기분 좋은 소름이 끼쳤다. 혓바닥의 감촉이 야릇하게 느껴졌다. 안나는 손바닥을 내려가 손목을 지나 팔꿈치로 조금씩 내려갔다. 그 촉감이 여과 없이 쾌락으로 느껴졌다.
마지막 남은 이성이 발악하듯 힘을 냈다. 정신 차려 이 괴물. 안나의 손을 뿌리치고 문으로 한 발짝 움직였다. 그것을 신호로 두 다리는 방 밖으로 달렸다.
그곳에서 도망쳐 방 안으로 돌아왔다. 문을 잠그고 문 앞에 주저앉았다. 두근거리는 심장이 세차게 느껴진다. 가라앉아. 제발. 괴물아. 가라앉아라. 나는 기도했다.
6.
결국 잠들지 못한 채로 새벽이 창밖으로 보였다. 억지로 눈을 감고 누워있던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지난밤 많은 생각을 했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떠올랐다.
조용히 옷을 갈아입고 방 밖으로 나갔다. 닫힌 안나의 방 앞을 지날 때, 그 안에 있을 안나가 떠올랐다. 걸음을 조심하며 움직였다. 아침은 생각이 없어 바로 현관을 지나 차에 올라탔다.
차에 시동을 걸고 저속으로 후진했다. 컨디션은 최악이었다. 창문을 내려 새벽 공기를 맡으며 속도를 올렸다. 도로에 주차된 차들을 지나 스포츠용품 센터가 있는 번화가로 향했다. 일자로 뻗어 있는 도로엔 차들이 없었다. 간혹 지나가는 반대편 차선의 차량만 보였다. 안나와 관련한 고민이 끊임없이 치고 올라온다.
머릿속이 복잡해서인지 CD나 라디오를 듣고 싶지 않았다. 모든 창문을 열고 속도를 올렸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정리하며 액셀을 밟다가, “엣취.” 하는 재채기 소리에 놀라 핸들을 틀었다. 차량이 좌우로 작게 흔들렸다. 브레이크를 밟자 뒤에서 작은 인기척이 들린다. 도로에 차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비상 깜빡이를 켜고 속도를 줄이며 백미러로 소리가 난 뒷좌석을 보았다. 그곳엔 안나가 있었다.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있던 거울 속의 안나와 눈이 마주쳤다. 안나는 담요를 두르고 앉아있었다. 분명 방에서 자는 줄 알았는데, 백미러에 보이는 것이 헛것은 아닐 것이다. 당황스러웠다. 뭐라 말하지 못하고 놀란 표정으로 뇌에서 상황을 이해하기까지 백미러와 앞을 부산스레 번갈아 보았다.
“…좋은 아침, 엘사.”
그 인사에 대답하지 않고 놀란 맘을 진정시키며 운전에 집중했다. 심장이 쿵쾅댔다. 젠장, 아침이라도 먹고 올 걸 그랬다. 양손으로 핸들을 꽉 쥐었다. 어딘가에 차를 세우고 싶었다. 조금 직진하면 주유소가 하나 있음이 떠올랐다.
진입로로 들어가 보니 아직 영업시간 전이라 주유소 기둥 주위로 간이 펜스가 있었다. 그 옆으로 있는 공터에 차를 세웠다. 주차 기어로 바꾸고 사이드 브레이크를 채웠다. 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앞문이 닫히자마자 바로 안나가 앉아있던 뒷좌석 문을 열었다. 안나는 뒤로 조금 물러나, 나를 바라보았다.
“네가 왜, 왜 여기 있어, 안나?”
“음….”
“방에 있는 줄 알았는데, 차에서 잔 거야? 어떻게?”
안나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하나 꺼냈다. 거실에 다른 키들과 함께 보관하던 비상용 키였다. 안나의 손에 들려 있는 키를 뺏었다. 낚아채는 것에 가까웠다. 안나는 별다른 행동은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일주일로 끝날 거 같지 않아서.”
“뭐?”
“이번에도 날 피할 것 같더라고.”
“….”
안나는 손을 뻗어 차 문을 잡고 있던 내 왼손을 잡았다. 그 접촉에 놀라 손을 뗐다. 안나는 입꼬리를 올렸지만, 눈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도 너무 위험했어. 사고 날 뻔 했잖아.”
“처음엔 복도에서 기다릴까 했어. 그런데, 창문으로 나가면 끝나는 거잖아?”
“…창문으로 다니는 건 우리 집에서 너 하나야, 안나.”
“내가 할 수 있는데, 언니가 못 할 리가 없잖아.”
말 끝부분이 조금 떠는 듯했다. 팔짱을 끼며 한 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놀랐던 것이 이제야 조금 진정되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이야기해서 어쩌자고? 옳지 않다는 원론적인 말을 하려고? 소용이나 있었나? 심지어 내가 먼저 시작한 주제에 그런 말을 할 자격이나 있어? 속으로 수많은 생각이 떠오르고 그것들이 되려 나를 찔렀다. 또한 그 어느 하나 안나에게 말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짧은 정적, 그것을 깬 건 안나의 배에서 난 꼬르륵거리는 소리였다.
“…일단 언니, 아침 먹으러 갈래?”
안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로 갈지 생각했지만, 아침에 운영하는 식당은 많지 않았다. 특히 이 근처에서는 한 곳뿐이었다. 안나를 다시 집으로 데려다줄 것을 생각하면 멀리 갈 수도 없었다. 안나에게 차에 타라고 이야기했다. 안나는 열려있는 뒷문을 닫고 조수석으로 향했다. 조수석에 앉아 벨트를 매는 안나의 모습이 보였다. 일단 차를 출발했다.
식당으로 향하는 중,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안나에게 어떻게 말할지 막막했고, 안나 또한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였지만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세 번째로 안나의 입이 열렸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닫혔을 때 식당에 도착했다. 이곳도 아직 이른 시간이라 포장만 가능했지만, 주차장을 이용할 수 있으니 괜찮았다.
“샌드위치 괜찮지?”
“아, 응. 같이 가자.”
지갑을 챙겨 차에서 내려 매장으로 걸어갔다. 안나는 한 발짝 뒤에서 따라왔다. 가게 문손잡이를 잡았을 때, 그 안에서 나오던 엘렌과 마주쳤다. 유리문 너머의 엘렌 또한 나를 보고 동작을 멈췄다. 나는 문을 열어주며 인사했다.
“안녕, 엘사. 좋은 아침이야. 샌드위치 사러 왔어?”
“안녕. 응, 아침으로.”
“여기 샌드위치 맛있지.”
안나는 옆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엘렌은 잠시 비켜주고 아예 밖으로 나왔다. 옆으로 살짝 비켜주었다. 엘렌은 2개 이상일 때 주는 큰 포장을 들고 있었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살짝 들어 보이며 말했다.
“애인이랑 같이 먹을 거라서 말이야.”
“그렇구나. 착하네.”
“그게, 애인의 그날이거든. 이런 거라도 해야지. 힘들 거 잘 아니까.”
“좋은 애인이네.”
“좋은 사람이거든. 하하, 부끄럽네.”
엘렌은 작게 웃으며 얘기했다. 여자와 사귀고 있다는 말을 쉽게 꺼낸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상대가 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미 그녀에게 고백받은 적이 있으니까. 엘렌은 먼저 간다며 이따 출근해서 보자고 말하고는 주차장으로 걸어갔고, 나도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메뉴 보드를 올려다보는 안나 옆에 서서 말을 걸었다.
“골랐어?”
“응. 오늘의 추천으로 먹을래.”
“그래, 마실 거는?”
“아침이니까 그냥 물 마실래.”
계산대로 걸어가 안나가 고른 것과 뜨거운 홍차 하나를 주문했다. 안나는 벽 가까이에서 주머니에 손을 넣고 서 있었다. 영수증을 들고 안나에게 건넸다. 안나는 번호를 확인하며 작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누구였어?”
“같이 일하는 사람.”
“친한가 봐?”
“고등학교 때 아는 사이였거든.”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손님이 적어 빨리 나온 것 같았다. 안나가 빨리 걸어가 받아왔다. 음료를 건네받고 가게를 나갔다. 차로 돌아왔다. 안나는 바로 샌드위치의 포장지를 벗겨 한입 가득히 물었다. 옆에 있던 생수병을 들어 뚜껑을 따고 컵 홀더에 놓아주었다. 시동을 걸며 말했다.
“집에 데려다줄게.”
“뭐? 언니 출근해야 하잖아.”
“아직 시간 괜찮아. 그리고 너 학교 가야지.”
“…고마워.”
천천히 차를 운전하며 집으로 향했다. 안나가 샌드위치의 마지막 조각을 삼키고 물을 마시는 것을 확인하고 속도를 올렸다. 집 앞에 차를 세웠다. 안전띠를 풀고 내리는 안나에게 말했다.
“가방 챙겨 와. 학교 데려다줄게.”
“진짜?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
안나는 빠르게 안으로 들어갔다.
조용한 적막에 잡생각이 삐져나왔다. 꼬리를 물고 떠오르던 그것은 안나에 관한 생각으로 이어졌고, 돌고 돌아 첫사랑이라는 단어가 되었다. 첫사랑. 사랑. 언제였을까.
안나가 처음 집에 오는 날, 아버지는 비디오카메라로 기념적인 순간을 촬영했다.
부드러운 천에 쌓인 갓난아기를 보는 내게 부모님은 동생이라며 안나를 소개했고, 사랑스럽지 않냐고 물었다. 영상 속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소파에 앉아 부모님이 품에 안겨준 그 아이를 바라보는 얼굴은 사랑스럽다는 눈빛보다는 신기한 호기심이나 낯선 생물에 대한 거리감이 담겨 있는 얼굴이었다. 그럼 그 시작은 언제였을까.
생각하는 중에 안나가 문을 열고 탑승했다.
“언니! 나 왔어. 준비 끝!”
안나는 웃는 얼굴로 자리에 앉으며 벨트를 맸다. 그 밝은 얼굴에 피식 웃음이 났다. 안나의 학교로 출발했다. 옛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어린 시절, 울고 있다가 학교에서 돌아온 나를 보고는 안아달라고 팔을 뻗고는 그 품이 좋았는지 울음을 그치고 웃던 안나. 나 또한 그 모습이 귀여워 웃음이 나왔었다. 그때였을까?
내 웃음에 안나가 눈치를 살피는 것이 느껴졌다. 입꼬리를 내려 표정을 굳혔다. 학교 근처에서 차에서 내리는 학생들이 보였다. 그 근처에 차를 세웠다. 안나는 차 문을 열지 않고 조금 머뭇거렸다. 재촉하지 않고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이따가 다시 볼 수 있는 거지?”
“…그래. 이따 집에서 봐.”
“약속해.”
안나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하자며 손을 내밀었다. 그 손가락에 새끼손가락을 걸어주자 안나는 그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기습적으로 내 볼에 입을 맞추고는 도망치듯 차 문을 열었다.
“약속했다! 고마워, 이따 봐 엘사!”
안나는 문을 닫고 빠른 걸음으로 학교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이 어렸을 때랑 똑같다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나왔다.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결정된 것이다. 역시 이곳을 떠나야 한다. 나는 안나의 곁에 있으면 안 된다.
이 마을을 떠나야 한다. 안나에게서 멀리 사라져야 해. 그래, 그래야겠다. 식어버린 차를 마셔버리고 차를 출발했다.
7.
“응, 선배. 고마워. 다음에 봐요.”
차량의 오디오에 핸즈프리로 연결되어있던 전화를 끊었다. 톡. 톡. 손가락으로 핸들을 두드리며 운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집 앞에 도착했다. 오늘도 부모님은 늦게 들어올 예정인지 차는 보이지 않는다. 늘 대던 자리에 주차하고 차에서 내렸다.
현관으로 향하는데, 위에서 “프슷” 하는 소리가 들린다. 위를 올려다보니 2층으로 안나가 창밖으로 몸을 내밀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실내 전등 불빛에 흐릿하게 비치는 얼굴은 밝게 웃고 있다. 그 웃음이 마음 깊숙이 파고든다. 나는 이 장면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잠시 멈춰서 같이 손을 흔들어주고는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다시 발걸음을 옮겨 현관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기 전 잠시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었다. 계단을 내려오려던 안나와 눈이 마주쳤다.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고, 안나도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서로 마주 보았고, 조금 어색한 기류가 흐르는 듯했다.
“약속 지켰네.”
“…응. 저녁은? 먹었어?”
“아니, 아직. 언니는?”
“나도. 파스타 해줄까?”
안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부엌으로 걸어갔다. 면 삶을 물을 먼저 불에 올리고, 부엌 냉장고를 열어보았다. 특별한 재료가 눈에 띄지 않았다. 냉동실을 열어 조각낸 채소 얼려둔 것과 냉동 새우를 꺼냈다. 안나는 조리대 맞은편으로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면을 넣고 그 물을 조금 덜어 팬에서 새우를 녹였다. 물을 버리고 채소를 넣고 한번 볶았다. 불을 끄고 병에 들어있던 토마토소스를 부었다. 면이 익기까지 아직 시간이 남았다. 안나도, 나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안나의 시선은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일부러 그녀를 외면한 채 등을 돌려 냉장고를 열었다.
“치즈도 넣을까?”
“음, 아니. 저녁인데 살찔 거 같아.”
“그래. 올리브는?”
“따로 차갑게 먹을래.”
“그래.”
냉장고에서 절인 검은 올리브를 꺼내 조금 옮겨 담고 안나에게 건넸다. 접시를 꺼내고 면을 건져서 소스와 함께 버무리고 접시에 옮겨 담았다. 접시를 안나에게 건넸다.
“고마워. 맛있겠다.”
싱크대로 옮긴 조리기구에 물을 부어두고 식탁에 앉았다. 안나는 잘 먹겠다고 말했다. 웃음이 나왔다. 행복에 질식할 것 같았다. 그럴 자격이 없는데도 말이다. 입맛이 없어져 접시에 올려져 있던 새우를 안나의 접시로 덜어주었다.
“언니 먹을 게 없잖아. 괜찮아. 내 것도 많은걸.”
“너 좋아하잖아. 많이 먹어.”
안나는 사양하지 않겠다며 웃었다. 식사를 마치자 안나는 설거지는 자신이 한다며 그릇을 가져갔다. 개수대 앞에 선 안나의 뒷모습을 보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했다. 오늘 종일 고민한 주제였고 안나와의 대화를 상상해봤지만, 어느 하나 긍정적이지 않았다.
“무슨 생각해?”
어느새 설거지를 끝낸 안나가 앞에 앉으며 말했다. 입이 마르는 것 같아 혀로 입술을 핥았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하는 생각.”
“…들어줄게. 말 해봐.”
안나는 내 말을 듣고 표정을 굳혔다. 나는 한 번 더 입술을 훑었다. 그때 현관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어머니였다.
“오셨어요.”
“그래. 저녁은 먹었니?”
“네. 언니가 파스타 해 줬어요. 엄마는요?”
“잘했다. 나는 사무실에서 먹었지.”
어머니는 부엌과 거실 사이에 있는 수납장 위로 가방을 내려두었다. 마침 어머니에게도 이야기하는 게 좋겠다 싶어 말을 꺼냈다.
“어머니. 저 할 말이 있어요.”
“응? 그래.”
“저, 남부에 있는 대학에 가려고요. 근처에 선배가 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마침 룸메이트를 구한다고 해서요. 먼저 반년 정도 거기서 지내면서 공부하려고 하는데, 혹시 보증금만 지원해 주시면 안 될까요?”
“어머, 정말이니? 진짜로? 그래, 잘 생각했다. 엘사.”
어머니는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잠시 뜸을 들였으나 다시 대학을 가는 것을 바라고 있었기에 좋은 반응을 보였다. 예상했던 반응이다. 하지만 안나는? 뒤에 있을 안나를 볼 수 없었다. 분명 상처받았겠지.
거칠게 바닥을 긁는 의자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토할 거 같아….”
안나는 나지막이 뱉고서 화장실로 달려갔다. 어머니는 체했냐며 약을 찾았고 나는 안나의 뒤를 따라갔다. 따라가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안나는 2층으로 올라가 화장실로 들어갔다. 닫힌 문고리를 잡아보니 다행히 잠겨있진 않았다.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안나는 변기 앞에서 허리를 숙이고 한 손으로 벽을 잡은 채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안나의 등을 두드려주려는데, 안나는 내 팔을 쳐내고, 어깨를 밀치며 거부했다. 안나는 울고 있었다.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는 문 앞에 약을 두겠다고 했다. 안나는 대답하지 않았고, 대신 내가 알았다며 대답했다.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문밖으로 들렸다. 안나는 눈물을 흘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너를 위해서야.”
“지랄하지 마. 너는 나를 위한 적 없어.”
“….”
“이기적이고, 제멋대로, 네 욕망대로, 꼴리는 대로 행동했지! 네가 날 생각했으면, 조금이라도 했다면 고백하지 말았어야지. 최소한 그렇게 멋대로 정하지 말았어야지!”
“안나….”
“나는 오늘 온종일 어떤 얘기를 할까, 어떤 모습으로, 어떤 표정을 해야 하나 생각했어. 아침에 봤던 네 모습에 기대했다고! 그런데 너는, 또 멋대로, 네 맘대로 떠난다고?”
“그게 옳은 선택이니까. 내가 너를 망칠….”
안나는 팔을 휘둘러 내 뺨을 때렸다. 충격에 순간적으로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가 돌아왔다. 휘청이는 몸을 바로 세우고 벽으로 물러나 기댔다.
“입 닥쳐. 역겨우니까.”
“…미안해.”
사과를 말하는 입에서 뜨거운 액체가 느껴진다. 손으로 만져보니 피였다. 말하는 와중에 뺨을 맞아 혀를 씹은 것 같았다. 많이 찢어진 것 같지는 않았다. 안나는 자신이 폭력을 썼다는 것 때문인지 아니면 입술에 묻어나온 피 때문인지 조금 놀란 눈치였다. 그 덕에 화는 조금 진정된 것 같았다. 나는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안나는 숨을 고르다 말을 내뱉었다.
“…그냥, 차라리 그냥 평범한 자매로 남을 수 있게 하지 그랬어.”
“…미안해.”
안나는 뒷걸음으로 벽에 기댔다.
“나도 모른 척 동생으로 남고 싶었어…. 왜 고백한 거야?”
계속해서 흘리는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다. 그것을 막겠다는 듯 다리는 뻣뻣하게 굳으며 벽에 힘을 실었다. 안나가 움직였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 힘겹게 몸을 막고 있던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았다. 내쉬는 한숨에 입에서 쇠 맛이 느껴졌다. 잠시 그대로 있다가 일어나 세면대에서 입을 헹궜다. 붉은 핏물이 나와 몇 번을 헹구고 뱉었다.
8.
이사 준비를 시작했다. 소식을 전해 들은 아버지는 잘 생각했다며 가서도 잘할 거라는 말과 함께 짧은 조언도 덧붙였다. 조금 많은 용돈과 함께였다. 일하던 곳에도 그만둔다고 이야기했고, 엘렌과는 계속 연락하기로 했다. 그 사이에 엘렌의 여자친구와 함께 식사도 했다.
그곳에서도 차를 사용하기 위해 직접 운전해서 가기로 했다. 차를 팔고 그곳에서 새 차를 사라고 하셨지만, 익숙한 이 차가 좋았다.
새벽에 출발하면 다음 새벽이 넘어야 겨우 도착할 거리였기 때문에, 중간에 숙소에서 자기로 계획했다. 짐을 도둑맞을 수도 있어서 좋은 호텔로 찾아두었다.
그날 찢어진 혓바닥은 결국 염증이 났다. 덕분에 며칠 동안 뜨거운 음식을 먹지 못했다. 발음이 조금 새고 목도 뻐근했지만, 티 내지 않도록 노력했다. 다행히 부모님에게 들키진 않았다.
안나와는 다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관계로 돌아갔다. 그렇게 끝났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타인에게서 상처받지 않도록, 내가 먼저 상처를 줬다. 어떤 변명을 붙이더라도 안나를 만날 자격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늦은 밤, 안나가 먼저 내 방에 들어왔다. 노크도 없이 들어온 안나는 내가 누워있는 침대 위로 올라왔다. 얼핏 잠이 들었었지만, 안나임을 알고 몽롱함은 사라졌다.
안나는 내 이불을 잡아 걷어내고 내 위에 올라타 나를 내려다보다가, 몸을 눕혀 내게 키스했다. 내가 놀라 밀어내려고 하자 팔을 잡아 누르며 작게 말을 꺼냈다.
“하루만, 한 번만…. 거부하면, 죽어버릴 거야.”
죽일 것이라는 말도 아닌 죽어버린다는 그 말에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그 목소리는 울기 직전처럼 떨리고 있었다. 내 죄의 결과다. 내가 안나를 몰아세운 것이고, 이렇게 만든 것이다.
순순히 안나를 받아들였다. 안나의 손이 상의 안으로 들어왔다. 옷 아래에 있던 피부에 안나의 손이 닿았다. 안나의 손이 올라와 가슴을 쥐었다. 다른 손으로는 상의를 걷어 올렸다. 몸을 들어 순순히 벗겨졌다. 식은 밤공기가 닿아 소름이 돋았다.
아무 말 없이 가슴 끝을 유린하고 입으로 물던 안나는 바지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놀라 다리를 움츠리자 다른 손으로 무릎을 잡았다. 안나의 시선에 안나의 말이 떠올랐다. 힘을 풀고 안나를 받아들였다. 밖으로 들릴까 신음을 참았고, 결국 그 손길에 절정을 느꼈다.
“언니가 평생 외로웠으면 좋겠어.”
절정 이후의 나른함에 숨을 고르는 내게 안나가 말했다. 안나는 조용히 말하며 체액이 묻은 손가락을 내 배를 문질렀다. 손길을 따라 피부에 그것이 묻어났다. 검지로 문지르는 손길이 무엇을 그리는 것인지 글자를 쓰는 것인지 느껴지지 않았다.
“괴롭고, 힘들었으면 좋겠어.”
“그래.”
고르지 못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비참하고 불행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알았어.”
“그래서, 다시 날 찾았으면 좋겠어.”
그 말에 입을 다물고 안나를 바라보았다. 가슴 옆으로 있던 안나의 팔을 잡고 당겼다. 안나는 순순히 따라오며 내 위로 누웠다. 안나를 안아주었다. 안나는 가만히 그 품에 안겼다. 몇 번 토닥여주었고, 안나는 내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새벽, 안나는 조용히 일어나 돌아갔다. 그때 잠에서 깼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문이 닫히고 안나가 나간 것이 느껴졌을 때 침대에서 일어났다. 침대 옆으로 떨어진 잠옷을 주워입고 의자에 앉았다. 가늘게 뜬 초승달이 하늘에 있었다.
9.
이른 새벽. 어슴푸레한 하늘이었다. 이 풍경도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마지막 상자를 차에 싣고 문을 닫았다. 깨지기 쉬운 것이나 의류 조금, 그리고 화장품 같은 것만 남기고 미리 항공우편으로 부쳤다. 그곳에 있는 선배에게 물건이 도착했다는 연락도 받았다. 생필품은 그곳에서 구매하면 되기에 더 챙길 것은 없었다.
안으로 들어와 부엌으로 향했다. 맛있는 냄새와 요리하는 소리가 가득한 부엌에서 어머니는 세 번째 음식을 그릇에 옮겨 담고 있었다.
“그렇게 많이 못 먹어요.”
“너만 먹니. 그리고 도시락도 싸주려고 하는데.”
“가다가 데워 먹을 수도 없어요. 조금만 싸 주세요.”
“어머, 그렇겠네. 알겠다. 샌드위치는 하루 정도는 괜찮지?”
말하지 않았다면 아마 가는 내내 먹을 수 있을 만큼 싸 주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도마에 빵을 올려놓고 샌드위치를 만드는 옆으로 아버지가 부엌으로 들어왔다. 손에는 CD가 몇 장 들려 있었다.
“핸드폰이랑 연동된다니까요.”
“그래도. 이거, 네 핸드폰에 없는 거야. 봐봐.”
“스트리밍이라 다 들을 수 있어요.”
“어허. 오래 운전하면 필요하다니까.”
아버지는 익살스럽게 웃으며 손에 들린 것들을 내밀었다. 내가 받아들자 손가락으로 맨 위에 있는 CD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꼭 반납 해야 하는 거 잊지 말고. 명곡이거든.”
“하하, 그게 뭐예요. 주는 거 아니었어요?”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안된다. 나중에 너희 자식들한테도 들려주기로 했거든. 대신 반납기한은 많이 주마.”
“똑같은 거로 두 개 더 있는 거 알고 있어요.”
옆에서 어머니가 끼어들었다. 아버지는 그건 소장용이라 뜯으면 안 되는 거라고 말했다. 나는 그 사이에서 그저 웃었다. 그 소란에도 같은 공간에 있던 안나는 말이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대화에 끼어들어 농담을 던졌을 텐데, 안나는 조용히 식탁 앞에 앉아 창밖으로 보이는 마당을 보고 있었다.
그날 밤 이후로 우리는 다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안나는 눈에 띄게 우울해졌고, 부모님은 조심스럽게 내게 물어보았다. 사실대로 말할 수 없던 나는 사춘기를 핑계로 대며, 시간이 지나면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시간이 안나를 도와줄 것이다.
곁눈질로 보고 있던 탓에 안나와 눈이 마주쳤다. 안나는 내가 있는 반대편으로 일어서 걸음을 옮겼다.
“속이 안 좋아요. 누워있을게요.”
안나는 천천히 거실의 소파로 가서 누웠다. 어머니는 음식을 식탁에 차리며 약 먹으려면 조금이라도 먹으라고 했지만, 대답은 없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운전해야 해서 많이 안 먹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결국 과식하고 말았다. 식사를 마치고 마지막 출발 준비를 했다. 화장실에서 나오며 칫솔은 쓰레기통에 버렸다.
부모님과 포옹을 하고 인사를 끝냈다. 그때까지도 안나는 소파에 누워있었다. 잠이 든 것 같았다. 아버지가 안나를 깨우려고 할 때 조용히 말렸다. 아픈데 그러지 말고 나중에 따로 통화하면 된다고 말했고, 아버지는 알겠다며 현관으로 향했다.
차에 시동을 걸었다. 아버지가 창문 안으로 손을 넣고 조수석에 놓아둔 CD를 툭툭 쳤다. 나는 그냥 웃어주었다. 아버지도 아무 말 없이 웃었다.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며 출발했다. 조금 달려 마을 외곽으로 나가 남부로 가는 고속도로에 올랐다.
그렇게 우리가 있었던 작은 마을을 떠났다. 두 번째였지만 마지막이었다. 한 손으로 핸드폰을 조작하며 음악을 재생했다. 재생목록에 있던 노래가 오디오에서 들렸다.
남부로 향하는 도로 위에서 끊임없이 잡생각이 떠올랐다. 대부분 옛 기억들이었다. 지평선 너머까지 이어진 도로는 거리 감각을 마비시킬 듯이 길었고, 신물이 날 정도였다.
중간마다 있는 오아시스 같은 휴게소에서 기름을 넣고 간식거리를 구매했다. 가판대 옆으로 엽서가 있었다. 종류가 다른 몇 장과 볼펜 한 자루를 구매했다.
차에 타고 출발하기 전, 생각났던 추억들을 그 뒤에 적었다. 다음 휴게소에서도, 또 다른 휴게소에서도 엽서를 샀다. 안나 취향의 엽서 한 장에는 아무것도 적지 못했다.
어느 휴게소의 사장은 돈만 주면 부쳐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사양했다.
저녁이 지나 도착한 호텔에서는 씻자마자 잠이 들었었다. 낯선 잠자리에 얼핏 깨어났다. 핸드폰으로 확인해보니 아직 다섯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시계 아래 떠 있는 알림을 보니 두 시간 전, 안나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내가 한 말 전부 잊어버려]
자판을 눌러 답장을 썼다. 그리고 전부 지우고는 ‘알겠어’ 세 글자를 눌러 답장을 보냈다. 그 후로 잠이 오지 않았다.
체크인할 때 보았던 호텔 자판기에서 과자와 음료수를 사고 대충 허기를 달랬다. 창밖으로는 남색의 하늘이 곧 동이 틀 것임을 알린다. 술이 생각났지만 구할 수도 없었고, 운전해야 했기에 참았다. 차라리 일찍 떠날까 싶어, 샤워를 다시 하고 짐을 챙겼다.
출발하기 전, 아버지가 추천했던 CD를 플레이어에 넣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어제 듣던 노래와 다르다는 것이 이렇게 좋을 줄 몰랐다. 그렇게 추천해 줄 만한 노래였다. 아버지의 흥얼거림 덕에 익숙한 박자에 따라 노래를 흥얼거렸다.
정오가 지났을 때, 마지막 휴게소가 보였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도시가 나올 것이다. 핸드폰으로 휴게소를 찍어서 선배에게 문자로 보냈다.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엽서를 샀다. 계산대 옆에서 엽서 위를 볼펜으로 끄적였다. 그것을 구경하는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우편 서비스 같은 거 해요?”
“팁만 주시면 제가 해드릴 수 있죠.”
주소는 생각나는 곳이 없어 일했던 곳의 주소를 적었다. 보내는 주소도, 이름도 없으니 알아서 버려줄 것이다. 20불짜리 지폐와 엽서를 같이 건넸다. 직원은 기분 좋게 받아들었다.
“‘절대 잊지 않을게.’ 무슨 의미예요?”
“그걸 주인 앞에서 읽어요?”
“어차피 다 보이는걸요. 궁금하잖아요.”
“비밀이에요.”
뒤돌아 밖으로 나가며 같이 구매한 생수를 열고 마셨다. 차에 올라타 오디오를 끄고 라디오를 켰다. 광고음악이 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속도로의 출구로 나왔고, 멀리 도시가 보였다.
남부 특유의 맑은 날씨와 어울리는 도시의 모습이었다. 외롭고, 괴롭고, 힘들고, 비참하고, 불행한 삶을 보내기엔 첫인상이 너무 좋았다. 웃음이 나왔다. 핸즈프리로 선배에게 전화를 걸며 내비게이션을 따라 달렸다.
10.
며칠째 책상 위에 내버려 둔 십여 장의 엽서를 어떻게 할까 생각했다. 버리거나 태우기는 싫었다. 엽서라는 것이 원래 누군가에게 편지를 보내기 위한 용도라지만, 그것은 가장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이대로 내버려 두자니, 누군가 들춰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결국 큰 액자를 사서 그 안에 전부 넣어버렸다. 액자의 판자 위에 엽서의 그림이 있는 면이 앞으로 나오게끔 배치하여 액자 속에 펼쳤다. 유리를 덮고 액자를 세워보았다. 엽서를 붙여놓지 않아 전부 아래로 떨어졌다.
이런, 다시 액자를 열고 엽서를 하나로 모은 다음에, 다시 그것들을 배치했다. 이번에는 아무것도 쓰지 않은, 그 유일한 엽서를 가운데에 두고, 그것 하나만큼은 그림이 보이지 않게 뒤집어놓았다. 이렇게 보니 제법 괜찮아 보였다. 엽서의 그림들 정 가운데 밑줄 그인 빈 엽서가 있는 모양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테이프로 엽서를 판자에 붙여놓았다. 다행히 이번에는 제대로 모양을 유지했다. 액자를 옷장 옆에 세워두었다. 그것을 발견한 선배는 기념품을 만들 정도로 좋았냐며 놀렸다. 아무 말 없이 웃어주었다.
근처 카페에 일자리를 구했다. 퇴근길에 잡화점에서 접착제를 하나 사 왔다. 액자 뒷면을 고정하는 걸쇠를 접착제로 칠해버렸다. 이제 액자는 망가지기 전까지 그 안을 열어볼 수 없었다.
그 외의 남는 시간에는 공부에만 집중했다. 남부는 겨울에도 긴소매 옷으로 충분했다. 가져온 옷 중에서 두꺼운 옷은 전부 버렸다. 이곳은 눈이 내리지 않았다.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이곳에 온 반년 후, 원하던 대학에 합격했었다. 화학공학과였다. 교수님의 대학원 권유에도 무사히 졸업했다. 4학년 때 인턴 활동을 했던 기업의 신입 연구직으로 입사했다. 이름있는 곳이어서 부모님이 많이 기뻐했다. 졸업식도 입학식과 똑같이 아무도 부르지 않았다. 그 뒤로 안나와 연락하지 않았다. 가끔 올라오는 부모님의 SNS로 소식을 확인했다. 지금쯤 대학생이겠지. 부모님은 이유도 없이 찾아오지 않는 딸을 서운해하면서도 탓하지는 않았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지나갔다. 그렇게 2년 더 지났다. 나는 어느새 27세가 되었다. 문득 시간이 빨리 지나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안에 안나가 없어서 그랬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공허함과 외로움이 손바닥을 간질였다.
그해 여름, 선배와 함께 휴가를 떠났다. 어느 호수 근처에서 여름을 보내기로 했다. 다른 지역에 살게 된 대학 동창들도 모이기로 해서 열 명이 넘는 인원이 모였다. 단기로 빌린 별장 주위로 여러 대의 차가 주차되었다.
오랜만에 본 지인들은 쉴 새 없이 근황을 얘기했다. 결혼을 준비하고 있다는 커플도 있었다.
첫날은 그동안 나누지 못한 대화를 하고 술과 음식 먹으며 지나갔다.
그다음 날에는 호수 주변을 구경했다. 점심을 먹고 근처 몇 명이 모여 오솔길을 따라 뛰고 걸으며 산책하고 장작불을 피웠다.
셋째 날에는 보트를 빌려 모두 보트에 올랐다. 맥주와 위스키 같은 술이 준비되어있었고, 다들 신이 나서 술을 마셨다.
나도 잔에 위스키를 따라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아직 한낮이었지만 호수 위에서 일몰을 보자며 다들 신이 났다. 그 사이에서 내가 기대어 있던 난간 밧줄 너머로 추락하게 된 건, 순식간이었다.
줄이 끊겨서일까, 무엇 때문에 떨어졌는지 모르겠다. 순식간에 하늘이 보였고, 물속으로 변했다. 본능적으로 허우적댐에도 점점 호수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 허무함에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해졌다. 허우적댐을 멈추고 서서히 추락했다.
올려다보는 시선으로 하얀빛만 들어왔다. 웃기게도 놓쳐버린 과거가 생각났다. 안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런 순간이 계속해서 스쳐 지나갔다.
후회일까, 되돌릴 수 없었다. 이기적으로 살아온 인생이었다. 통제할 수 없는 욕망을 따랐고, 멋대로 타인을 휘두른 인생이었다. 그 죄에 대한 대가가 이제야 찾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불행한 죽음이 코앞에 다가왔다. 안나가 보고 싶어졌다.
눈을 감고 마지막 숨을 내뱉었다. 공기 방울이 수면 위로 올라가는 것을 마지막으로 시야가 어두워졌다. 누군가가 내 팔을 붙잡았다. 아니, 수초가 내 팔에 얽혔다. 기억이 흐릿했다. 밝은 빛과 어두운 암전이 교차했다. 모든 것이 몽롱했다.
안나가 눈앞에 앉아있다. 그동안 꿈에서 본 모습과는 달리 어른이 된 안나다. 적당한 햇빛이 들어오는 공간이었고, 나는 병원 로고가 그려진 이불을 덮고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안나는 그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있었다. 안나와 눈이 마주쳤다. 외형은 성장하여 앳된 티는 사라졌지만, 그 눈은 그대로였다. 안나의 존재에 진짜 현실이라고 느껴졌다. 나는, 죽지 않았구나.
침대에서 일어나려다가 힘이 들어가지 않아 상체만 겨우 세워 앉았다. 세워져 있는 침대 난간을 내리고 바닥에 발을 디뎠다. 얼마나 누워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비틀대며 걸었다. 안나에게로 걸어갔다. 그 앞에 도착했을 때, 안나를 끌어안았다. 무게중심이 기울어져 안나에게 기대는 꼴이 되어버렸다. 안나는 별 반응 없이 내 품에 안겼다.
“보고 싶었어.”
“….”
갈라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안나에게 먼저 말을 걸었지만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대학교에 입학했더라. 입학식 못 가서 미안해. 네가 그리웠어. 머리 모양 바꿨네. 잘 어울린다. 예뻐졌네. 어떻게 지냈어? 수많은 말들이 떠올랐지만 결국 입에서 나온 말은 다른 것이었다.
“키스해줄래?”
“싫어.”
그 거절에 이상하게도 웃음이 나왔다. 곧이어 흉부에서 기침이 올라왔다. 안나에게서 고개를 돌려 기침했다. 허리를 굽힌 탓에 가슴골 사이로 보이는 병원복 안의 피부가 검붉게 피멍이 들어있었다. 누군가가 나를 살렸구나. 수초가 아니었구나.
안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기침에 흔들리는 몸을 잡아주었다. 안나에게 기대어 기침이 진정되자 안나가 생수를 따서 건네주었다. 메말라버린 입으로 들어오는 물은 분명 맹물일 텐데도 달콤했다. 작은 병에 있던 물을 다 마셨다.
“고마워.”
“….”
안나는 그것을 가져가 소파 뒤에 있는 창틀에 올려놓았다. 밖으로 나갈 것 같은 기분에 안나의 팔을 붙잡았다.
“가려고?”
“…아니.”
안나는 환자임을 생각해서인지 나를 소파에 앉혔다. 나는 안나의 팔에서 손을 떼지 않고 부축받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안나의 손바닥을 잡고 그곳에 입을 맞췄다. 안나는 놀란 듯했지만 떼어내려고 하지는 않았다. 말라 갈라진 입술에 뜨거운 살결이 느껴졌다. 늘 따뜻한 손이었다.
입술은 뗐지만, 그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손을 잡고 내 볼을 감싸게 했다. 힘주지 않은 손바닥은 순순히 따라왔다.
“그리웠어. 안나.”
“…하.”
안나는 한숨 쉬며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너를 사랑하고 있어.”
안나는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문득 옛 생각이 났다. 첫 고백에도 나는 그저 안나에게 널 사랑한다는 단순한 말을 내뱉었다. 안나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말없이 잡고 있던 안나의 손목에 입을 맞췄다. 손목에서 안나의 향기가 났다. 혀끝으로 튀어나온 핏줄을 살짝 핥았다. 입술을 떼고 안나의 팔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나의 가까이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진짜 죽는 줄 알았어.”
“….”
“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후회가 되더라.”
“….”
“뭐가 무서워서, 그렇게 행동했는지. 너를 상처 줬는지.”
“….”
“우리가 동성이고, 자매고. 그런 거, 다 좆까라고 할걸.”
안나는 내 손을 쳐내며 벗어났다. 나는 팔을 힘없이 늘어트리며 비틀거리며 바로 섰다. 안나는 화가 난 듯하면서도 감정이 가득 찬 얼굴이었다.
“여전히 제멋대로지? 미안해.”
안나는 아무 말 없었다. 나는 계속해서 말을 꺼냈다.
“그래도, 다시 한번 사랑해 줄래?”
“하, 하….”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보고 싶었어. 그렇게 떠나면 안 되는 거였는데.”
“나는 전혀 보고 싶지 않았어. 네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살았어.”
“나는 무서웠어. 내가 너를 망칠거라 생각했어.”
“미친년…. 늘 제멋대로지.”
“맞아. 늘 그랬지. 그리고 여전히 널 사랑해.”
“나는 아니야. 네 말대로 내가 착각한 거였어.”
“아니. 너도 날 사랑해. 너도 알잖아.”
“하. …너 진짜 변한 게 없구나?”
“응. 그러니까, 용서해주면 안 될까? 안나.”
나는 안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잠시 날 바라보던 안나는 내 어깰 밀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의자에 다시 주저앉게 되었다.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안나의 손이 내 멱살을 붙잡았다. 나를 내려다보던 안나는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 내 품에 매달려 울던 안나는 나한테 제멋대로인 개새끼라며 욕을 했다. 하지만 내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나는 어깨를 적시는 안나의 눈물을 느끼며 그 등을 토닥여주었다. 안나가 진정했을 때, 그녀에게 키스했다.
상황이 진정되고 안나는 의료진을 불러 내가 깨어난 것을 알렸다. 진찰을 받고 내일 퇴원해도 된다는 이야길 들었다. 안나는 보호자로 있기로 했다. 나는 침대 옆 작은 간이침대에 누우려는 안나에게 옆으로 올라오라고 했다. 안나는 싫다고 했지만 결국 내 옆에 누웠다.
우리는 침대에 함께 누워 많은 대화를 나눴다. 내가 하루 동안 의식이 없었다는 것과 선배가 안나에게 연락해서 부모님은 아직 모른다는 이야기부터 우리가 함께하지 않은 시간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동이 틀 무렵, 창문 밖으로 새벽빛이 비치자 안나는 누가 보기 전에 침대에서 내려가야겠다며 일어났다.
병실에서 짐을 정리하는 안나의 뒤에서 끌어안았다. 안나는 몸을 돌려 나를 안아주었다. 이 품에 닿기까지 참 멀리 돌아왔다. 이제는 떠나지 않을 것이다. 안나에게 매달리듯 품에 안겼다.
외전.
그 후로 우리는 남부의 아파트로 돌아왔다. 안나의 학교가 개강하기 전까지는 함께 지내기로 했다. 집주인인 선배는 괜찮다며 흔쾌히 받아들였다. 우리는 셋이서 함께 놀고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나는 선배 몰래 안나의 몸을 만졌고, 안나는 그런 내 손을 후려치는 일상을 보냈다. 안나는 우리의 관계를 생각해 매우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나는 작은 손장난 외에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따랐다.
다만 지금처럼 우리 둘만 남아 있을 때에는 고집을 부려 안나를 몰아세운다. 안나의 목덜미를 우물거릴 때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안나의 손이 이마를 밀쳐 결국 물러났다.
핸드폰을 확인한 안나가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현관 밖으로 나갔다. 언뜻 보인 화면에는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아빠. 7년간 보지 못한 가족이었다.
짧은 단어 하나로 순식간에 작은 마을로 되돌아갔다. 그 마을에 있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몸은 이미 식었고 마음 또한 멀리 떠나버렸다. 책장 한쪽에 꽂아둔 CD를 바라보았다. 팔짱을 끼고 책상에 걸터앉아 있는 사이에 안나가 돌아왔다. 그녀는 내게 팔을 둘러 안기며 뒷볼 가까이에 코를 가져다 대었다. 나는 조용히 그녀의 손을 느끼다 입을 열었다.
“아버지였어?”
안나는 손을 잠시 멈췄다가 내 옆에 걸터앉았다.
“응. 근처에 오셨다더라.”
“위즐타운?”
안나의 학교가 있는 지역을 말하자 고개를 끄덕인다.
“일이 있어서 들렸다고 보고 싶다고 하시더라.”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지금 가도 내일 도착하는데. 그냥 다음에 집에 간다고 얘기했어.”
안나를 바라보았다. 서로 눈이 마주쳤다. 입꼬리를 올려 웃자 그녀 또한 작게 웃는다.
“나도 같이 갈까?”
안나는 내 팔에 팔짱을 끼며 내게 기댔다.
“…저 액자, 어디서 산 거야?”
“여기로 오는 고속도로.”
“예쁘게 배치했네.”
“너 줄까?”
“아니. 어차피 언니가 내 것인데 뭐.”
“푸핫.”
내가 소리내어 웃자 안나도 작게 웃었다. 잠시 뒤 방 안이 조용해졌다.
“무리하지 않아도 돼.”
“집에 가는 건데 무리는.”
“…아빠 엄마를 부를까?”
“아냐. 가자.”
안나가 기댄 팔에 손길이 느껴졌다. 안나가 내 팔뚝을 붙잡고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바라보고 있었다.
“언니 팔 되게 하얀 거 알아?”
“햇빛을 못 봐서 그래.”
“그랬는데 어떻게 키도 크지?”
“내가 식물이야?”
“나는 운동도 했는데 언니보다 작잖아.”
“내가 네 것인데 뭐 어때?”
안나가 침을 튀기며 웃는다. 안나와 지내며 유머 감각이 늘었다. 내심 뿌듯함을 느끼며 안나를 보았다. 웃는 탓에 내게 몸을 더 기대던 안나가 내 시선에 고개를 들고 마주 본다.
“같이 갈까?”
안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위즐타운 들렀다가 갈래. 너무 오래 비웠어.”
“그래. 나 휴가 끝나기 전에 가자.”
“마음먹은 김에 바로 갈까?”
“그럴까?”
나는 책상에서 내려오며 안나를 안았다. 안나는 내게 안겼고 나는 그녀를 안아 들고 휘청이다가 침대에 누웠다.
“꺅!”
던지듯 누웠지만 다행히 안나의 옆에 부딪히지 않고 눕는 데 성공했다. 나는 재빠르게 이불을 잡고 안나를 끌어안았다.
“일단 좀 잘까!”
“뭐래! 지금 해 떴거든!”
안나가 소리내어 웃더니 발버둥치며 침대 밖으로 나갔다.
“나 먼저 씻는다!”
“그래.”
혼자 남은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 핸드폰을 들어 비행기 표를 찾아보았다. 집으로 돌아가면 안나와 어색하게 있어야 하려나? 괜찮은 비행기 표를 보다가 안나가 탈 기차도 확인해보았다.
사흘 후, 안나는 먼저 위즐타운으로 떠났다. 그녀를 기차역에 내려주고 나는 다시 아파트로 돌아왔다. 나는 내일 아침 비행기를 타고 마을 근처 공항으로 간다. 근처라고 해도 한 시간을 달려야 했지만, 꼬박 하루를 넘게 달려야 하는 이 도시보다는 근처임이 틀림없다.
짐을 정리하다가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피식 웃음이 났다. 엽서를 잔뜩 붙여놓은 액자 한가운데에 변화가 있었다. 분명 안나의 글씨체다.
가방에는 잊지 않고 CD를 챙겨 넣었다. 플록즈. 아버지가 좋아하는 앨범 이름이다. 7년을 연체했지만, 그 정도는 가족 할인으로 봐주시지 않으려나? 혼자 웃으며 아버지와의 재회를 상상했다.
비행기를 타고 다시 택시를 타고 집을 돌아갔다. 익숙한 길을 지나 멈춘 곳은 너무나 익숙해 7년의 공백이 느껴지지 않았다. 현관 앞에서 기다리던 아버지가 달려와 나를 끌어안았다.
“잘 지내셨어요?”
“네가 아주 그리웠다.”
“플록즈가 아니고요?”
“그건 널 다시 보기 위한 마법이었어.”
“통했네요.”
“왜 이리 말랐니?”
“할머니에요?”
“많이 변했어. 키는 그대로구나.”
“아빠는 그대로인데요?”
“어른이 됐어.”
“7년 전에도 성인이었어요.”
“벌써 7년이나 지났니? 시간 참 빠르구나.”
“그러게요. 진짜 빨리 지나갔어요. 어머니는요?”
“안에 있다. 먼저 들어가렴.”
아버지는 내 팔을 두드리더니 집으로 등을 밀었다. 그리고 이미 짐을 다 꺼내고 기다리고 있던 택시 기사에게 인사하며 짐을 건네받았다. 나는 익숙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눈물을 터트리셨다. 내 입에서 죄송하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어머니는 보고 싶었다며 오랫동안 나를 놓아주지 않으셨다.
그날 저녁, 어머니는 다섯 가지의 요리를 만들었다. 옆에서 말리지 않았다면 내가 좋아하는 음식 전부를 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같이 말려주리라 생각했지만, 아무 말씀 없이, 오히려 어머니와 같은 마음인 것 같았다.
“여보, 안나는 언제 온대요?”
“내일. 역으로 마중 나가려고. 엘사, 너도 미리 말했으면 마중 나갔을 텐데.”
“공항은 멀잖아요. 택시 있는데요 뭐. 이거 맛있네요.”
“많이 먹어. 왜 이렇게 말랐어.”
“그렇지? 나만 그렇게 보이는 거 아니지?”
“나 이미 배부른데요. 덜어놓은 것까지만 먹을래요.”
내가 접시에 있는 음식을 가리키며 말하자, 어머니는 빠르게 음식을 내 접시 위로 덜어두었다. 결국 배가 터지도록 먹은 나는 그릇을 정리하는 어머니께 설거지는 내가 한다며 자처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허. 엘사. 오랜만이라고 해도 잊은 거니?”
아버지가 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이스크림이랑 차 있다. 우유도 있어.”
어머니의 말에 아버지의 의도를 이해했다. 후식은 우리 가족 식사의 규칙이었다.
“푸핫. 난 또, 뭐 잘못했는지 알았잖아요.”
“여보. 나는 아이스크림이요.”
“준비합죠. 엘사, 너는?”
나는 메뉴를 다시 생각해봤지만, 역시 이 부엌에서 우유를 먹긴 힘들 것 같았다.
“아이스크림이요. 초코칩 들어간 바닐라로요.”
“초코칩 들어간 건 초코맛 뿐이야.”
“그럼 바닐라요.”
“준비하겠습니다.”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머니께 우스꽝스럽게 인사하며 냉장고로 향했다.
우리는 각자 아이스크림 한 스쿱씩 쥐고 그 자리에 몇 시간이 넘게 대화를 나누었다. 아버지는 잠시 일어나 설거지를 하며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지금 일하는 곳에서 하는 업무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먼저 자러 가야겠다고 이야기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방으로 올라가는 것은 어색하면서도 자연스러웠다. 내 방 옆에 있는 안나의 방이 눈에 띄었다. 닫힌 문을 열고 안을 확인했다. 안나가 고등학교 때 쓰던 모습 그대로였다. 아니, 그때보다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내 방도 그러려나? 나는 안나의 방에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순식간에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안나의 방 창문에 기대어 밖을 바라보았다. 집으로 오는 아버지의 차가 보였다. 집 마당에 멈춘 차에서 아버지가 내렸고, 안나의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는 트렁크로 향했다. 안나가 현관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그녀를 불렀다.
“프슷. 안나.”
안나가 위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다시 마주했다.
안나는 위즐타운으로 떠나기 전, 몰래 액자에 매직으로 글씨를 썼다. 고속도로에서 산 엽서의 그림들 정 가운데. 밑줄 그인 빈 엽서가 있는 자리. 유리 위로 파란색 두꺼운 글씨가 선명했다.
[Happy ever after.]
안나가 나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나는 이 장면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